헌 집 줄게 헌 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by혜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남편이 또 와서 슬슬 건드린다.

"작가님~글 좀 써지십니까?"

아오......

자기가 집중할 때는 내가 재채기만 한 번 해도

"어허~"하면서,

본인이 심심하거나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내가 뭘 하든 전혀 상관없다.


아이들이 귀가하면 같이 헌바카라방에 가자고 한다.

하긴, 봄 연휴에 헌바카라방에 가져가려고 싸놓은

큰 바카라 더미 두 개가

벌써 몇 달째 서재 한구석에 놓여 있다.

영차 들어서 차에 싣고 가기만 하면 되는데

우린 둘 다 게을러서

코앞에 닥치지 않으면 잘 안 움직인다.


귀찮아하는 아이들에게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꼬셔서

오랜만에 집 근처 헌바카라방에 갔다.

헌바카라방이라고는 해도 큰 건물 층마다

바카라, 의류, 스포츠용품, 전자기기, 생활용품 등

없는 거 없이 취급하고 있다.

바카라을 맡겨 놓고 처리되는 동안 가게 안을 둘러본다.

딸아이는 만화 코너에,

아들은 게임과 피규어 코너에,

나는 DVD 코너에,

남편은 어슬렁거리며 우리 주위를 맴돈다.


그 많은 바카라이 딸랑 몇 천 엔으로 환산되는 걸 보면

허무하기도 하지만,

차마 쓰레기 처리를 하기엔 용기가 필요한 바카라들을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나는 그 돈으로

내가 예전부터 좋아하는 영화의 DVD를

보물찾기 하듯이 꼼꼼히 뒤져서 한 두 개를 산다.

《살인의 추억》도《아마데우스》도

《쇼생크 탈출》도《사랑과 영혼》도 모두 여기서 찾아냈다.

이번엔 《보헤미안 랩소디》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컬러 퍼플》을 샀다.

항상 헌 바카라을 팔아 헌 영화를 산다.


그날 밤 거실에서 아들과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를 봤다.

오래된 코미디 영화인데 상영될 당시에

너무 재미있게 봐서

아이들과 같이 웃고 싶어서 샀다.

자고 있던 남편이

우리 웃음소리에 놀라서 뛰쳐나올 정도로

우리는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영화는 1998년에 상영된 작품이니

거의 25년 정도 전의 영화다.

하지만 나는 보면서 무엇보다 그 참신함에 놀랐다.

스토리에서도, 배우들에게서도,

심지어 카메론 디아즈의 패션에서도

전혀 세월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25년 전에는

흘려보낸 내용까지 새롭게 보여서

난 코끝이 찡해지기까지 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헌 것과 낡은 것은

어쩌면 다른 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되었다고 모두 낡은 것은 아니다.

헌 것의 반대어가 새 것이지만

새 것이 반드시 새롭고 참신한 것이 아닐 수도 있듯이......

궤변 같기도 하지만,

우리는 골동품을 보며 낡았다고 하지 않고

오래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낡은 음악이라고 하지 않는다.

고궁도 마찬가지다.

그럼 오래되었는데도

낡았다고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게 궁금해졌다.


아들과 바이바이를 한 후,

이를 닦고 침대에 들어가 자려고 누웠다.

옆에서 고롱고롱 작게 코를 골고 자는

한 오래된 아저씨가 보였다.


아항~이거였구나.

오래되었어도 낡고 헐었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


세월이 지났음에도 세월을 느끼게 하지 않고

그것과 닿으면 지나간 내 시간이 새롭게 떠오르고

익숙하면서도 질리지 않고

잊고 있다가도 문득 다시 찾게 되고

내다 버릴까 하다가도 애착이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


오래되었어도 그 매력이 지속되는 것.


아마 그런 것들을

우리는 낡았다고 부르지 않는 건 아닐까.


나는 헌 아저씨 옆에 누워

그 얼굴을 새삼 따뜻하게 바라보면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