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에서 사람으로, 다시 구조로
2차 국면에 들어서자 협상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처음에는 “같이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수준이었던 대화가, 이제는 실제 법인과 계약, 역할과 바카라임의 문제로 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JV가 현실적인 안건이 되는 순간부터, 모두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법무팀이 들어왔고, 재무팀이 들어왔고, 각 조직 내부의 이해관계자들도 하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대화의 중심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처음에는 시장과 기술, 실행 구조를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훨씬 인간적인 질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JV가 잘 되면, 기존 조직에서 내 역할은 어떻게 되는가.”
“실패했을 때, 누가 바카라임을 지는가.”
“이 선택이 내 커리어에는 어떤 흔적으로 남는가.”
돌아보면 대부분의 협상은 여기서 속도가 느려진다. 사람들은 구조보다 사람을 먼저 움직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많다. 구조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특히 JV는 더 그렇다. 일반적인 프로젝트나 계약은 실패해도 기존 조직 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JV는 다르다. 새로운 조직을 만든다는 건 단순히 사업 하나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안정적인 경로에서 잠시 벗어나는 선택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숫자보다 먼저 자기 위치를 계산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전략을 조금 바꿨다. 구조 설명은 줄이고, 사람 이야기를 늘렸다.
처음부터 해오던 그 대화로 돌아간 것 일 수 도있고, 이렇게 돌아가기 위해 처음부터 그렇게 집요하고 끈덕지게 함께 고민했는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이야기 나눈 그 질문들로 말이다. 왜 지금 이걸 해야 하는지, 왜 굳이 JV라는 번거로운 방식을 택하려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 판에 어떤 각오로 들어오고 있는지.
우리는 이 JV가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아니라, 지금 시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실행 방식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기존 조직 안에서는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외부 계약만으로는 끝까지 바카라임질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이미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지도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정리했다.
A. 기존 조직 안에서 계속 시도해 보는 방법.
B. 새로운 법인을 만들어 별도의 팀으로 움직이는 방법.
JV를 만든다는 건 단순히 법인을 하나 더 추가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 기존 조직에서는 만들기 어려웠던 속도, 기존 계약 구조에서는 불가능했던 집중도, 그리고 개인에게도 명확한 역할과 결과가 남는 구조라는 점이었다.
이미 제안은 던져진 상태였다. 그 이후의 설명은 “가능한 선택지”를 “더 현실적인 선택지”로 바꾸는 과정에 가까웠다.
중요했던 건, A와 B를 똑같이 중립적인 선택처럼 포장하지 않는 것이었다. 두 선택은 결과도, 속도도, 바카라임도 전혀 다르다는 점을 분명하게 남겨두고 싶었다. 결국 협상은 다시 구조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훨씬 더 개인적인 고민과 감정이 섞인 상태였다.
최종 합의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드라마틱한 선언도 없었고, 영화 같은 악수도 없었다 (물론 악수는 있었지만 영화 같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 단계로 갈수록 대화는 더 담담해졌다. 이미 핵심적인 판단은 이전 미팅들에서 대부분 끝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건 누가 더 유리한 조건을 가져갔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로가 이 판에 무엇을 걸기로 했느냐에 더 가까운 협상이었고 조율이었다. 각자가 혼자서는 끝까지 밀기 어려웠던 일들, 기존 조직 안에서는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리던 아이디어들, 계약만으로는 바카라임지기 어려웠던 실행들, 그걸 함께 가져가기 위해. 꼭 해야 하지만 언제나 밀려났던 프로젝트들을 모아 JV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돌아보면 이 협상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조건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결국 끝까지 가지 못했던 경험들이었다. 인턴십, 공동 프로젝트, 파일럿, PoC. JV는 그 수많은 실패들과 실패까지도 가지 못한, 완주조차 하지못한 아쉬움의 반대편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을 구조로 만든 결과. 그래서 지금도 나는 이JV를 단순한 협상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여러 번 시도해 보고도 안 되었던 것들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결심은 조건표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지나온 시간과 대화, 그리고 서로가 확인한 한계들 위에서 천천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AI 조인트 벤처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아직까지도 실제로 움직이는 조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