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디테일 (4)

자료와 정적

byJames

요번 JV를 공격적으로 논의하던 시기에도 그랬고, 이전에 바이오테크 기업들을 검토할 때도 비슷했다. 내부 검토만 몇 달이 걸렸고, 앞으로의 사업 계획과 프로젝션을 수없이 들여다봤다. 특히 바이오테크 딜에서는 과학 자문단과 애널리스트들이 만든 자료의 양이 상당했다. 임상 데이터, 시장 자료, 경쟁사 분석, 밸류에이션 모델까지 바인더 하나가 금방 채워질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제 미팅에서는 그 자료의 대부분을 펼쳐보지 않았다.


처음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는 준비한 자료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는 것이 좋은 미팅이라고 생각했다. 밤새 만든 분석을 설명하고 싶었고, 상대방도 그 노력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사실 당시 내 업무 자체가 그런 일이었다. 수십 장 짜리 보고서의 모든 폰트를 회사 양식에 맞추고, 열과 줄을 맞추고, 자간과 행간을 조정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엑셀 모델을 만들고 변수들을 조정하는 일이 늘어났고, 또 몇 년이 지나서는 후배들이 만든 보고서와 모델에서 오류를 찾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좋은 미팅일수록 자료를 덜 본다.


자료를 보는 이유는 대개 둘 중 하나다. 기억이 나지 않거나, 아직 설득이 되지 않았거나. 이미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대화에서는 자료가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필요한 순간 잠깐 등장했다가 다시 뒤로 물러난다. 실제로 좋은 협상은 슬라이드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라이드를 덮은 뒤에 시작되는 경우도 많았다.


JV 논의도 그랬다. 처음 몇 번의 미팅에서는 자료가 꽤 중요했다. 규모를 설명해야 했고, 왜 기존 조직 안에서는 실행이 어려운지 보여줘야 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업 모델도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자 더 이상 슬라이드가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러면 이 팀은 누가 맡나요?", "실패하면 어떻게 되죠?", "기존 조직과의 관계는 어떻게 가져가죠?" 같은 질문들이 대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는 숫자보다 사람이, 자료보다 판단이 중요해졌다.


돌아보면 자료는 상대를 설득하는 도구라기보다 같은 언어를 쓰기 위해 준비하는 참고서다. 같은 방향을 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슬라이드보다 서로를 읽기 시작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아직도 종이를 선호한다

태블릿이 훨씬 편하다는 건 안다. 검색도 쉽고 무게도 가볍다. 하지만 종이는 덮을 수 있다. 이게 생각보다 중요하다. 논의가 끝났으면 자료를 바로 덮는다.


종이들을 정리하거나 귀퉁이를 접는다거나, 상대방은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끄적이는 행위는 미팅룸이라는 절제된 환경에서 하나의 드라마틱한 장치처럼 보일 때가 있다. 자료를 덮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 행동에서 의미를 찾는다.


예를 들어 더 이상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옵션이나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을 때 자료를 덮는다. 반대로 자료를 계속 펼쳐두면 실제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도 상대방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아직 이야기 안 한 게 남았나?
더 요구할 게 있나?
뭔가 다른 카드를 가지고 있나?

협상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은 행동을 통해 많은 것을 읽어낸다.


가죽 바인더를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특별히 내가 한국 증권사에서 일을 배울 때 직속 선배가 선물해 준 물건이라서도 아니다. (선배, 미안 ?) 그렇다고 고급스러워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요즘에는 노트북이 워낙 얇고 가벼워져서 체감상으로는 짐이 두 배 이상 늘어나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미팅이라면 노트북을 사무실에 두고 갈지언정 바인더는 챙기는 편이다.


물론 중요한 숫자나 조항은 대부분 머릿속에 넣고 들어간다.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과 동일한 출력물을 상대에게 건네고, 같은 페이지를 펼치고, 필요한 부분을 짚고, 기록하고, 다시 덮는 과정이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내가 그 방식에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협상에서는 상대를 편하게 만드는 것만큼 나 자신을 편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익숙한 환경에 있을 때 더 잘 듣고, 더 잘 생각하고, 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침묵을 채우기 위해 정보를 꺼낸다. 그리고 그 짧은 침묵을 견디는 사람은 종종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상대가 자기 말에 확신이 없어 보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상대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문장을 대신 완성해 주거나 논리를 정리해주려고 한다. 그런데 협상에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많다.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직급이 높을수록 그렇다. 그래서 가능하면 스스로 정리하도록 둔다.


JV 협업을 논의할 때였다. 질문 하나를 던졌는데 상대방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보통은 그 순간 말을 보탠다.

"제 말은 이런 뜻입니다."
"조금 더 설명드리면."

하지만 나는 그냥 기다렸다. 길어봐야 2~3초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짧은 정적 뒤에 원래 답변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 개인적인 생각, 조직 내부의 우선순위, 그리고 처음에는 말하지 않으려 했던 고민들까지.


숫자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더욱 그렇다.

사람은 계산을 시작하면 잠시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머릿속으로 숫자를 맞춰보고, 손익을 따져보고, 자신의 조직으로 돌아갔을 때 설명해야 할 내용을 정리한다. 그때 말을 계속하면 설명하는 사람만 열심히 말하고 상대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투자도 그렇지만 협상도 결국 상대방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의사결정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대신해줄 수 없다. 상대가 계산하고 있다면, 그 계산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때로는 가장 좋은 전략이다. 아니 애초에 상대는 이미 듣고 있지 않다.


협상이 끝나는 장소

대부분 사람들은 협상이 회의실에서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내 경험은 조금 다르다. 오히려 엘리베이터 앞이 더 기억에 남는다. 바이오테크 기업 S와의 미팅도 그랬다. 회의실 안에서는 임상 데이터와 투자 조건, 이슬롯 구조 이야기를 했다. 누가 어떤 권한을 가져갈지, 어떤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회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 대화는 완전히 달라졌다.

출장 이야기.
뉴욕 날씨 이야기.
최근 읽은 바카라 이야기.

그리고 많은 경우 사람들은 계약서보다 그런 순간을 더 오래 기억한다. 투자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회의실을 나가면서도 계속 협상을 했다. 문 앞에서 "아, 하나만 더"를 꺼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도 조건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안했던 것 같다. 뭔가 하나라도 더 얻어내야 할 것 같았고, 혹시 놓친 게 있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협상은 언젠가 끝나야 한다.

그리고 끝났다는 사실을 상대방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협상은 이미 끝났고, 그 시점부터는 다음 관계를 만드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문 앞에서 갑자기 "아, 하나만 더"를 꺼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면 다음 미팅을 잡으면 된다. 그 자리에서 꼭 해야 하는 이야기라면 애초에 회의실에서 끝냈어야 한다. (보안에도 좋지 않다)


대부분의 딜은 한 번의 협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JV도 그랬고, MIT와의 협업도 그랬고, 개발도상국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였다.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같은 사람들을 반복해서 만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이번 미팅에서 무엇을 얻느냐보다, 다음 미팅을 어떤 분위기로 시작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협상이 아닌 대화를 한다. 조건이 아니라 사람 이야기를. 그런 사소한 대화들이 다음 협상의 분위기를 만들고 관계를 만든다.


사소하지만 의외로 신경 쓰는 것

상대방 자료 위에 내 자료를 올려놓지 않는다. 별것 아닌 행동 같지만 은근히 거슬린다. 특히 상대가 직접 준비해 온 자료라면 더 그렇다. 바카라상 위에서도 사람은 자기 영역을 인식한다. 굳이 건드릴 이유가 없다.

투자자든 창업자든, 교수든 공무원이든 대부분 자기 자료에는 애착이 있다. 밤늦게까지 수정하고 검토했을 테니까. 그런 자료 위에 아무 생각 없이 내 자료를 덮어놓는 행동은 불필요한 정보를 전달한다.


미팅 이후 이메일도 비슷하다.

의도적으로 짧게 쓴다. 특히 협상이 잘됐을수록 더 짧다.

길어질수록 설명처럼 보이고, 설명은 다시 설득처럼 보인다. 이미 이해한 내용을 다시 설명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불안해 보인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회의 때 못한 이야기가 있었나?" 혹은 "생각이 바뀐 건가?"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조건보다 맥락을 먼저 적는다. 오늘 JV 구조를 논의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보다, 오늘 AI 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지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을 먼저 쓴다. 나는 사람들은 숫자를 잊어버려도 왜 그런 숫자가 나왔는지는 더 오래 기억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 페이지의 자료나 의도된 정적 따위의 테크닉은 대단한 준비나 협상 기술이라기보다 방해물을 치우는 작업에 가깝다. 어찌 됐건 협상은 상대방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좋은 협상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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