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천사는 도서관에 산다.
막연히 생각했었다.
언젠가 아이비리그에 합격하게 된다면 꼭 입학수기를 써야겠다고.
하지만 막상 석사 준비 기간이 끝난 뒤의 삶은, 그런 글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1년 넘게 준비했던 석사 지원이 끝나자마자 국제기구 취업이 이어졌고, 국제기구에서의 삶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서의 인턴십이 시작됐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정규직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삶의 밀도는 이상할 만큼 계속 높아졌다.
회사에서는 정규직 전환 이후 거의 매년 직급과 역할이 바뀌었다. Analyst를 건너뛰고 Associate가 되었고, PM을 건너뛰고 시니어프로젝트매니저, 그리고 어느 순간 Vice President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부서도 계속 바뀌었고 담당하는 업무는 늘어만 갔다. 논문을 쓰고, 프로젝트를 하고, 콘퍼런스를 다니고, 발표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다른 무언가를 준비했다. 석사를 준비하면서 반쯤 취미처럼 시작했던 연구와 글쓰기, 강의, 그리고 기록하는 습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어쨌든 지난 몇 년 동안 ‘그냥 온라인 게임인’은
아이비리그에서의 입학뿐만 아니라 석사과정을 마쳤고, 국내 석사를 했고, 국제기구에서 일했고, 국제 콘퍼런스에 논문을 냈고, 한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곳들에서 패널이나 발표자로 연단에 섰고, 미국 인턴십을 했고, 비자를 준비했고, 스타트업을 검토했고, MIT 및 브라운에서 일을 했고, 뉴욕에서 일을 했고,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브라운대학교와 싱크탱크를 만들었고, 학생들을 멘토링했고, 그리고 또 하루를 버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글의 프롤로그에서 처음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실 바뀐 것은 별로 없다. 여전히 나는 뉴욕 어딘가에서 출근하고 퇴근하는 ‘그냥 온라인 게임인’이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삶을 대하는 습관 하나 정도였던 것 같다.
차선바카라의 차선바카라까지 준비하는 습관.
H-1B가 안 되면 어떻게 할까. 그것도 안 되면? 그다음은?
. 석사가 안 되면?
. 취업이 안 되면?
. 요번 협상이 안 되면?
. 투자가 안 되면?
생각해 보면 요 몇 년 내 커리어는 언제나 완벽한 확신보다는, 불확실성 안에서 계속 다음 선택지를 준비하며 움직여온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나와 같은 보통의 '그냥 온라인 게임인'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 과정 속에서 중요한 건 결과 자체보다도, 계속 앞으로 움직이는 모멘텀을, 그리고 방향성을 잃지 않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과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에 차선바카라을, 혹은 차선바카라의 차선바카라까지 준비하는 습관이 생겼다. 석사의 차선바카라으로 국제기구를 준비했고 미국취업의 차선바카라으로 언제나 한국에서의 취업옵션을 열어두고 있었다. 협상과 투자 역시 언제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든 옵션을 열어둔다.
처음에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입학수기였다. 그런데 쓰기 시작하니 하고 싶은 말이 끝없이 늘어났다. 이 글은 어느 순간부터 단순한 합격 후기가 아니라, 내 준비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족에게 보내는 조금 늦은 편지 같기도 했고, 오랜만에 연락할 때마다 “너는 왜 맨날 국가랑 하는 일이 바뀌냐”라며 웃던 오랜 친구들에게 전하는 안부 같기도 했다. 또 소중한 방학 계절학기에서 시간을 들여 강의나 특강에 와주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격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협회나 기관의 전문가 특강에서 만난 초급 전문가 과정의 후배들에게 강사이긴 하지만 스승이 아니라 넥타이에 걸려 차마 못해준 응원과 조언의 말이기도 했다.
아마 앞으로도 더 많은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다. 한국에서의 석사 전략, 미국 취업 과정, 국제기구 지원 이야기, 네트워킹 방식, 인터뷰 질문과 답변, 120년 된 미국 유대계 온라인 게임에서 살아남는 법, 그리고 Analyst와 PM을 건너뛰고 Associate와 Senior PM, Vice President까지 비교적 빠르게 올라가게 된 이야기들까지. 신기하게도 글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더 많은 토픽이 생겨났다.
나는 무의식의 힘을 믿는다.
아이비리그 합격 직후가 아니라,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고, 그제야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되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지금 생각나지만 미처 글로 옮기지 못한 이야기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냥 여기저기 흩어진 기록들이지만, 언젠가는 내 무의식 안에서 잘 발효되고 숙성되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형태로 남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에는 도서관에 머무는 천사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인간들의 생각을 조용히 바라보고, 기록하고, 말없이 곁에 머문다. 그리고 고뇌하는 인간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어떤 작은 깨달음 같은 것이 찾아오곤 한다.
어쩌면 나 역시도, 여의도에서 퇴근한 뒤 독서실에 가서 늦은 밤까지 공부하던 시절에 그런 천사의 손을 잠깐 빌렸는지도 모르겠다. 석사과정을 준비하던 밤,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며 취업준비를 하던 어떤 아침, 논문을 붙잡고 있던 새벽, 결과를 기다리던 막막한 시간들, 그리고 내가 감히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하루하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결과를 만드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영감이나 극적인 한 번의 기회가 아니다. 대부분은 이름 없는 하루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퇴근 후 도서관에 남아 있는 시간,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의 공부, 불안한 와중에도 다시 노트북을 여는 반복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어딘가의 ‘그냥 온라인 게임인’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하루하루를 버티며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다.
진심으로 응원한다.
천사는 도서관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