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누군가를 욕망하는가

몸은 무엇을 알고, 마음은 무엇을 원하는가

byNavyblue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를 붙일 수 있다. 친절해서, 지적이어서, 이야기가 잘 통해서, 함께 있으면 편해서.

그런데 욕망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때때로 아무런 이유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에게 끌린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고, 가까이 앉고 싶고, 손끝이 닿는 것을 의식한다. 머리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몸은 이미 그 사람을 알아본 것처럼 반응한다. 그래서 욕망은 사랑보다 조금 먼저 오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왜 하필 당신을 원하는가.


플라톤은 『향연』에서 사랑을 결핍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바라본다. 인간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망한다. 완전하지 않기에 완전함을 꿈꾸고, 혼자이기에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그 유명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도 여기에서 나온다. 인간은 본래 하나였지만 둘로 갈라졌고, 이후 잃어버린 자신의 절반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화다. 하지만 사랑과 욕망의 이상한 감각을 놀랍도록 잘 설명한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 같은 사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기울어지는 사람. 우리는 그런 순간에 흔히 말한다.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욕망의 가장 정직한 문장은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당신이 좋다.

image.png인간은 본래 하나였지만 둘로 갈라졌고, 이후 잃어버린 자신의 절반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훨씬 냉정했다. 그는 남녀의 사랑 뒤에 종족 보존이라는 자연의 의지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조차 사실은 생명이 다음 세대를 선택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대한 착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역시 인간의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성적 에너지, 곧 리비도를 이야기했다. 그들에게 욕망은 낭만보다 본능에 가까웠다. 조금 서운한 설명처럼 들린다. 내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결국 호르몬과 번식의 장치에 불과하다니. 그런데 인간은 이상한 존재다. 생물학에서 시작했지만 생물학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배가 고파 음식을 먹지만 요리를 만들고, 추위를 피하려 옷을 입지만 패션을 만들며, 번식을 위해 성적 욕망을 갖지만 그 위에 사랑과 시와 음악과 기억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욕망은 본능일 수 있지만, 에로티시즘은 인간이 그 본능에 의미를 입히는 방식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시즘』에서 인간이 서로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나는 결코 당신이 될 수 없다. 당신의 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도 없고, 당신의 생각과 슬픔을 전부 알 수도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몸 안에 갇힌 독립된 존재다. 그런데 사랑과 섹스의 순간만큼은 그 경계가 흔들린다. 나와 당신 사이에 존재하던 거리가 잠시 사라지는 듯한 경험.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상대의 몸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경계를 잠시 넘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몸을 향한 욕망 깊은 곳에 고독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이다.

image.png나는 결코 당신이 될 수 없다.

자크 라캉은 욕망에 관해 더 불편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욕망은 어떤 것을 얻는다고 완전히 충족되지 않는다. 그토록 원했던 사람과 사랑을 시작해도 또 다른 결핍이 생긴다. 그토록 바라던 친밀함을 얻고도 문득 외로워진다. 왜일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단순히 한 사람의 몸이나 존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 이런 질문의 답까지 얻고 싶어 한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가. 나는 매력적인 사람인가.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욕망에는 언제나 타인의 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나 자신이 있다. 누군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때때로 그 사람의 눈을 통해 욕망받는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종교는 오랫동안 욕망을 경계해 왔다. 특히 기독교 역사 안에서는 욕망과 육체가 죄와 연결되어 말해진 순간들이 많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는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인간의 무질서한 상태와 연결해 해석해 왔다. 하지만 성서 전체가 몸과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서 한가운데에는 놀라울 정도로 육체적인 사랑의 노래가 있다. 『아가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과 머리카락과 입술과 몸을 노래한다. 서로를 그리워하고 찾고 기다리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욕망을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보다

사랑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 역시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제외하지 않는다. 몸은 실수가 아니다. 욕망 역시 그 자체로 악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문제는 욕망의 존재가 아니라 그 욕망이 타인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있다. 욕망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을 원한다.” 그러나 사랑은 거기에 하나의 문장을 더한다. “그래서 당신의 자유까지 존중한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능력과 태도의 문제로 보았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강렬하게 끌리는 감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돌봄, 바카라임, 존중, 이해가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욕망과 사랑의 차이가 드러난다. 욕망은 상대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한다. 사랑은 묻는다. 내가 가까이 가는 것이 당신에게도 좋은가. 욕망은 만지고 싶어 한다. 사랑은 묻는다. 당신도 나의 손길을 원하는가. 욕망은 소유하고 싶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결국 상대가 하나의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성숙한 에로티시즘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욕망에 존중을 더하는 것이다.


나는 섹스의 아름다움이 가장 격렬한 순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직전의 작은 순간들에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순간. 손을 뻗기 전에 잠시 기다리는 순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묻는 순간. “괜찮아?” 어쩌면 에로티시즘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신음도 고백도 아니라 이 짧은 질문인지 모른다. 괜찮아? 그 질문 안에는 욕망과 절제가 함께 있고, 몸과 인격이 함께 있으며, 나의 욕구만큼 당신의 자유도 중요하다는 선언이 들어 있다.

image.png괜찮아?

우리는 왜 누군가를 욕망하는가. 플라톤이라면 잃어버린 무엇을 찾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고, 쇼펜하우어라면 생명의 의지 때문이라고 할 것이며, 프로이트라면 리비도를, 라캉이라면 결핍을, 바타유라면 분리된 존재가 경계를 넘고 싶어 하는 갈망을 이야기할 것이다. 종교는 여기에 하나의 질문을 더한다. 그 욕망 속에서 당신은 상대를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 있는가. 어쩌면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욕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욕망하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한 사람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을 수 있고, 한 사람을 더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욕망도 있다. 몸을 탐하는 시선이 있는가 하면, 그 몸 안에서 살아온 한 사람의 역사까지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그리고 나는 후자를 욕망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누군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 앞에서 내 몸과 마음이 깨어나는 신비를 발견하는 일. 그래서 욕망의 가장 아름다운 완성은 상대를 소유하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을 원하면서도, 당신이 당신으로 존재할 자유를 사랑하는 것. 『섹스의 미학』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