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길에서 조금 벗어나 나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디자이너가 아니었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스쳐가는 식당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내가 살아가며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그래도 나였을까를 생각한다.
어쩌면 손바닥에 그려진 지도대로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시간속에 무르익어 버린 모든 것이 180도 달라져 버린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 본다.
말이 없고
적당히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과 간격을 두고
설탕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닌, 만약이라는 전제에 지난 경험이 무력화되어 다른 색이 칠해져 있을지도 모르는 나를 상상하는 날도 있다.
내가 착하거나,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징글맞게도 착한 사람에게는 관심없는 나에게 또 다른 자아가 생겨 지금 칠해져 있는 것이 불에 탄 설탕의 잔해였다면 나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이미 악마이기도 천사이기도 거부한 상태이다.
사람은 오래도록 자신을 설명하며 살아간다.
왜 그렇게 했는지, 왜 떠났는지, 왜 남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타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하나의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문장이 내가 되어버린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얼마나 부질없는 이야기인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살아보니 인간은 문장보다 자주 틀리고, 계획보다 자주 흔들리며, 자신이 정해놓은 방향에서 아무렇지 않게 벗어난다. 어쩌면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경로라는 것이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하는 것이 현명하겠으나, 틀렸다. 그것은 진실과 거짓이 혼합되어 있는 믹스커피 같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마치고, 일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일어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는 것. 세상이 만들어놓은 시간표를 따라가면 적어도 크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시간표를 꽤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안에서 내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잠시 다른 버튼을 눌렀다.
변칙 모드. 평상시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주변이 달라진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는 일은 처음에는 일탈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오래 걸어보면 그것은 일탈이 아니라 조정에 가깝다. 남들이 정해놓은 속도에서 내 속도로, 남들이 옳다고 부르는 방향에서 내가 견딜 수 있는 방향으로 삶의 설정을 바꾸는 일.
어떤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어떤 날에는 밤이 깊도록 문장을 붙잡고,
어떤 날에는 오래된 관계를 미련 없이 내려놓고,
어떤 날에는 이유도 없이 낯선 골목으로 들어선다.
예전 같으면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이래도 괜찮은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묻는다.
'이렇게 살아야 내가 괜찮은 것은 아닌가.'
나이가 들수록 삶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반대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많이 가지는 일이 아니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알아가는 일에 가깝다.
사람도 그렇고, 욕망도 그렇고, 빌어먹을 체면도 그렇다.
한때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썼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하고 싶었다.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이 조금씩 귀찮아졌다.
잘 살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보다 오늘 하루를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했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보다 나 자신에게 비겁하지 않은 것이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삶의 모양이 조금 이상해졌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길에서 한 발짝 벗어난다고 해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길을 잃어야만 보이는 풍경이 있었다. 지도에 없는 골목에서 만나는 오래된 나무처럼, 계획하지 않았던 하루가 오히려 오래 기억되기도 했다.
나는 이제 내 삶에 약간의 오류를 허락하려 한다.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도착해도 좋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도 좋고,
한참 고민했던 일을 하지 않아도 좋고,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선택을 해도 좋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각인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눈치 볼 필요도 없으며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정확하다.
인생이 꼭 완벽하게 작동해야 하는 기계는 아니니까.
가끔은 멈추고,
가끔은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가끔은 이유 없이 처음으로 돌아가도 된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느냐보다 그 길 위에서 누구로 남느냐일 것이다.
나는 이제 나를 조금 덜 통제하려 한다.
내 안에 남아 있는 오래된 규칙들을 하나씩 지우면서, 그 빈자리에 새로운 문장을 적는다.
나는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리고 그 문장을 품고 다시 길을 걷는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길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괜찮다.
길의 모양이 달라진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은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아닌 것들을 하나씩 벗겨내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는 조금 다르게 살아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상 모드가 지겨워진 날에는
망설이지 않고 변칙 모드로.
아무도 박수를 보내지 않는 방향이라도,
그곳에 내가 있다면.
박수가 없어도 상관 없다.
이미 고요한 것을 즐기며 마시는 믹스커피보다는
설탕하나 들어가지 않은 씁쓸한 아이스 커피가 내겐 제격이다.
나로 살아 가는 길에, 변칙모드는 선택이다.
하루의 반복도 지루해 죽겠는데, 똑같이 살아갈 필요는 없다.
정해진 길에서 조금 벗어나 나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