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언 퍼플 : Tyrian Purple

견딘 시간은 결국 하나의 색이 된다.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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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던 색.
빛을 머금는 대신 어둠을 오래 견디는 색.
왕의 옷에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왕보다 먼저 늙어버린 색.
화려함의 반대편에 서서 화려함을 기억하는 색.


색에는 저마다 태어난 장소가 있지만, 어떤 색은 장소보다 오래된 욕망에서 태어난다.


Tyrian Purple : 티리언 퍼플.

붉음과 푸름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다 끝내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깊은 자주색으로 가라앉은 색이다. 밝은 곳에서는 붉은 기척을 내고 어두운 곳에서는 검은 얼굴을 드러낸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색의 성질이 달라지는 까닭에 나는 이 색을 오래 바라볼수록 인간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색으로 살아간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기쁨 안에도 슬픔이 들어 있고, 사랑 안에도 두려움이 숨어 있으며, 가장 단단해 보이는 사람의 내면에도 오래 눌러놓은 연약함 하나쯤은 자라고 있다. 사람을 한 가지 색으로 규정하는 일은 그래서 늘 실패한다. 인간은 본래 혼합되어 태어나고,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빛을 받아들이며, 끝내 자신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색이 되어간다.


티리언 퍼플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이 색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작은 생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많은 생명을 모으고, 부수고, 끓이고, 기다리는 오랜 과정 끝에 아주 적은 양의 색이 남았다. 그래서 이 색은 단순히 아름다운 보라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값이 되었던 색이고, 기다림이 사치가 되었던 시대의 색이며,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을 얼마나 귀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색이었다.


나는 그 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

사람도 결국 자신이 지나온 시간으로 색을 만든다는 생각 때문이다.


젊었을 때의 나는 삶이 빨리 변하기를 바랐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다르기를 원했고,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자주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되었다. 사람을 깊게 만드는 것은 변화의 속도가 아니라 견뎌낸 시간의 밀도라는 것을.


상처 하나가 사람을 바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떠난 사람 하나가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데도 계절 몇 번으로는 부족하다. 실패를 실패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고, 지나간 사랑을 사랑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게 되는 데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간이 한 겹씩 내려앉는다.

처음에는 선명한 붉은색이었던 감정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어느 순간 푸른 기운을 머금는다. 분노였던 것이 체념이 되고, 체념이었던 것이 이해가 되고, 이해라고 생각했던 것마저 어느 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으로 변한다.

그 모든 색이 겹쳐진 자리.

나는 그곳에서 티리언 퍼플을 본다.


아름답지만 쉽게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색.
화려하지만 화려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색.

붉은 피를 품고 있으면서도 푸른 밤처럼 차갑고, 검은 어둠을 닮았으면서도 아주 깊은 곳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빛을 품고 있는 색.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런 색을 하나씩 갖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선명한 색만 좋아했다. 빨강은 빨강이어야 했고 파랑은 파랑이어야 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고 싫으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색과 색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회색지대를 알게 되었다. 사랑하면서 미워할 수 있고, 용서하면서도 다시 만나지 않을 수 있으며, 행복했던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삶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웠다.

티리언 퍼플을 보고 있으면 오래된 상처 하나를 손끝으로 만지는 기분이 든다. 이미 아물었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은 흔적. 더 이상 아프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 손이 닿으면 내가 무엇을 지나왔는지 기억하게 되는 흔적.


나는 이제 그런 흔적을 감추고 싶지 않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색이 하나씩 있다. 실패의 색, 이별의 색, 후회의 색, 혼자였던 밤의 색. 한때는 그것들을 검게 덮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색들이 나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깊이는 내가 사랑했던 것의 깊이만큼이나 내가 잃어버린 것의 깊이에서 비롯되었을 테니까.


그러므로 티리언 퍼플은 왕의 색이 아니라 견딘 사람의 색이다.

많이 사랑했고, 많이 잃었으며, 몇 번쯤 자신을 버리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불러본 사람.

빛과 어둠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고, 그 둘을 모두 자신의 몸에 받아들인 사람.

나는 그런 사람들의 색을 좋아한다.


찬란해서가 아니라 깊어서.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색은 어쩌면 그런 색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붉지도 않고, 완전히 푸르지도 않으며, 검은 어둠 속에서도 끝끝내 자신의 색을 잃지 않는 것.


Tyrian Purple.

오래 살아낸 시간이 마침내 한 가지 색으로 침전되었을 때, 사람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색.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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