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칫집 밴드에서 오케스트라의 여왕이 되기까지
지난번에는 내 머리 위를 지나가는 햇빛, 트럼펫 이야기를 했다. 금관 줄 맨 끝에서 가장 높은 소리로 무대를 뚫고 나오는 악기였다. 오늘은 고개를 돌려 정반대 방향, 무대 맨 앞을 보려 한다. 지휘자 왼쪽부터 쫙 늘어선 사람들, 턱 밑에 작은 나무 상자를 끼우고 수십 개의 활을 칼군무처럼 똑같이 올리고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이올린이다.
바순 자리는 목관 줄, 오케스트라 가운데쯤이다. 거기서 앞을 보면 바이올린 섹션은 늘 넓게 펼쳐진 풍경이다. 수십 개의 활이 한 방향으로 동시에 올라가고 내려가는 걸 뒤에서 보고 있으면 정말 파도가 치는 것 같다. 오늘은 그 파도 이야기를 조금 길게 해 보려 한다.
우아한 여왕님이니 처음부터 궁전에서 태어났을 것 같지만, 바이올린의 시작은 꽤 소박했다. 16세기 초 북이탈리아에서 태어났을 때, 바이올린은 동네 잔치에서 춤 반주를 하던 악기였다.
1556년 프랑스의 음악가 필리베르 장브 드 페르는 비올은 신사와 상인들이 여가를 즐기는 악기이고, 바이올린은 춤 반주에 흔히 쓰는 악기라고 적었다. 비올은 무릎이나 다리 사이에 세워 점잖게 켜는 다른 집안 악기다. 말하자면 비올은 양반집 도련님의 취미였고, 바이올린은 잔칫집 밴드였다. 소리가 크고 쨍해서 시끌벅적한 잔치판에 딱 맞았던 것이다.
우리말에도 바이올린을 낮춰 부르는 '깽깽이'라는 말이 있다. 초보의 삑사리를 떠올리면 참 찰떡같은 별명인데, 유럽에서도 첫 신분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인생이 바뀐 건 17세기다. 1607년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에 바이올린이 이름을 올렸고, 1626년 프랑스 루이 13세의 궁정에는 '왕의 24대의 바이올린'이라는 전속 합주단까지 생겼다. 잔칫집 밴드가 왕궁 전속 악단이 된 것이다. 그 뒤로 코렐리가 바이올린 연주의 교과서를 쓰고, 베네치아의 '빨간 머리 신부님' 비발디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200곡 넘게 쏟아냈다. 19세기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소문까지 돌던 파가니니가 나타나 원조 월드 스타가 됐다.
춤판에서 왕궁까지 이어지는 신분 상승기와 그 시절 그림들은 블로그에 연표와 함께 정리해 두었다. 바이올린 이야기 1편 보러 가기
바이올린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도시가 북이탈리아의 크레모나다. '바이올린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드레아 아마티가 여기서 활동했고, 그가 1564년에 만든 '샤를 9세' 바이올린은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바이올린으로 꼽힌다. 아마티 가문의 공방에서 과르네리 가문의 첫 장인이 나왔고, 그리고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등장한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악기를 라틴어식으로 부르는 이름이 스트라디바리우스다. 평생 1,000점 남짓 만들었고 지금 약 650점이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다. 2011년 경매에서 1721년산 '레이디 블런트'가 약 1,590만 달러, 당시 환율로 170억 원이 넘는 돈에 팔렸다.
왜 그렇게 비쌀까. 과학자들이 수십 년째 매달리고 있지만 딱 떨어지는 정답은 없다. 추운 시기에 나무가 촘촘하게 자랐다는 설, 니스에 비밀 레시피가 있었다는 설, 300년 동안 명연주자들의 손에 나무가 길들었다는 설이 나온다. 그런데 눈을 가리고 옛 명품과 좋은 새 악기를 비교하게 했더니 연주자들이 생각만큼 잘 구별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 결국 그 가격에는 소리와 함께 역사와 희소성, 그리고 전설의 값이 붙어 있는 셈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화는 따로 있다. 2007년 1월,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1713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워싱턴 DC의 지하철역에서 43분 동안 몰래 연주를 했다. 1,097명이 지나갔고, 멈춰 서서 들은 사람은 일곱 명 남짓이었다. 번 돈은 52.17달러. 좋은 음악도 들을 준비가 돼 있어야 들린다는 이야기를 나는 이 실험에서 배웠다.
바이올린은 400g 안팎이다. 스마트폰 두 대쯤 되는 무게다. 앞판은 가볍고 잘 울리는 가문비나무, 뒷판과 옆판은 단단하고 무늬가 예쁜 단풍나무로 만든다. 맨 위의 돌돌 말린 스크롤은 소리와는 거의 상관없는 장식이라, 장인들이 솜씨를 뽐내는 자리다.
내가 바이올린 구조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몸통 안에 숨어 있다. 앞판과 뒷판 사이에 연필 굵기만 한 나무 기둥 하나가 끼워져 있는데, 이름이 사운드포스트다. 프랑스어로는 âme, 이탈리아어로는 anima. 둘 다 '영혼'이라는 뜻이다. 이 기둥은 접착제 없이 끼워져 있어서, 몇 밀리미터만 움직여도 소리가 확 달라진다고 한다. 수리점에서 "영혼 좀 살짝 옮겨 주세요"라는 말이 진짜로 오간다니,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난다.
줄을 받치는 브리지도 접착제 없이 줄의 압력만으로 서 있다. 활이 줄을 긁으면 그 떨림이 브리지를 타고 앞판으로, 사운드포스트를 지나 뒷판으로 번지고, 몸통 전체가 스피커처럼 소리를 키워 f홀로 내보낸다. 줄이 가수라면 몸통은 마이크와 스피커다.
활에는 말총이 150~200가닥쯤 매달려 있다. 그런데 새 활을 송진 없이 켜면 거의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털이 줄 위를 스르륵 미끄러지기만 하기 때문이다.
송진을 문지르면 털이 살짝 끈적해지면서 줄을 붙잡는다. 줄이 끌려가다가 툭 미끄러지고, 다시 붙잡혀 끌려간다. 이 붙었다 미끄러졌다가 1초에 수백 번 반복되면서 소리가 난다. 연주가 끝난 줄과 앞판에 하얗게 쌓인 송진 가루는 그날 얼마나 열심히 켰는지를 보여 주는 눈 같은 것이다.
바이올린 줄은 낮은 쪽부터 G·D·A·E, 이웃한 줄끼리 모두 완전5도 간격이다. 공연장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인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차이도 여기서 시작된다. 비올라는 C·G·D·A. 가운데 세 줄은 같고, 바이올린은 위에 E를, 비올라는 아래에 C를 하나씩 더 가졌다. 몸통은 비올라가 한 뼘쯤 크고, 악보는 비올라만 가온음자리표를 읽는다. 바이올린이 밝은 소프라노라면 비올라는 따뜻한 알토다.
조율과 아이용 바이올린 사이즈, 비올라와의 차이는 블로그 2편에 그림으로 하나씩 풀어 두었다. 바이올린 이야기 2편 보러 가기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은 두 팀으로 나뉜다.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퍼스트와 세컨드다. 대편성이면 둘을 합쳐 30명 가까이 앉기도 하니 오케스트라 최대 파벌이다.
퍼스트가 더 잘하는 사람들이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데, 실력 순서가 아니라 맡은 일이 다르다. 퍼스트는 주로 높은 음역에서 멜로디를 노래하고, 세컨드는 화음과 리듬을 채우며 때로 멜로디와 주고받는다. 세컨드 악보는 화음 속 가운데 음을 계속 짚어야 해서 오히려 더 어렵다는 말도 있다. 목관 한가운데서 화음을 받치는 바순 주자로서, 나는 그 마음을 안다.
단원이 다 앉은 뒤 혼자 박수를 받으며 들어오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다. 공연이 끝나면 지휘자가 그 사람과 악수를 한다. 악장, 콘서트마스터다. 퍼스트 맨 앞줄 지휘자 바로 왼쪽에 앉아, 오보에가 A음을 내면 튜닝을 이끌고, 수십 명의 활을 올릴지 내릴지 정한다. 내가 뒤에서 보는 그 파도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악장이 정한 보잉 덕분이다. 그러니 공연 끝의 악수는 오늘 단원들을 대표해 수고했다는 인사인 셈이다.
처음 듣는 분께는 두 곡을 권한다.
바흐의 샤콘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의 마지막 곡이다. 반주 하나 없이 바이올린 한 대로 15분 가까이, 짧은 주제 위에 변주를 수십 번 쌓아 대성당 같은 음악을 만든다.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곡을 극찬했고, 피아노 왼손만으로 치는 편곡까지 만들었다. 처음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럴 땐 첫 부분의 묵직한 화음만이라도 들어 보시면 좋겠다. 바이올린 한 대에서 이런 소리가 난다는 게 믿기지 않을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차이콥스키를 제일 좋아하는 내가 빠뜨릴 수 없는 곡이다. 1878년에 썼지만 처음 헌정받으려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트 아우어는 너무 어려워 연주할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1881년 빈 초연 뒤에는 평론가 한슬리크가 귀에서 악취가 나는 음악이라는 혹평까지 남겼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다. 역사는 차이콥스키 편이었다. 3악장의 신나는 러시아 춤곡 리듬을 꼭 들어 보시면 좋겠다.
하나만 더 보태자면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다. 세 악장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데, 1악장과 2악장을 잇는 다리가 바순이 길게 끌어 주는 음 하나다. 바순 파트 입장에서는 이 곡 최고의 하이라이트다. 비발디 〈사계〉와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셰에라자드〉까지 여섯 곡의 영상은 원문에 모두 걸어 두었다. 바이올린 이야기 3편에서 명곡 플레이리스트 보기
바이올린 악보를 옆에서 슬쩍 보면 까만 음표가 빼곡하다. 목관은 한참 쉬다가 몇 마디 불고 끝나는 날도 있는데, 바이올린은 거의 쉬지 않고 달린다. 합주가 끝나면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대신 바순은 숨이 찬다. 각자의 고생이 있는 셈이다.
잔칫집 밴드 출신으로 왕궁에 들어가고, 400g짜리 나무 상자 안에 영혼을 품고, 수십 명이 한 몸처럼 활을 움직이는 악기. 바이올린이 여왕이라 불리는 건 혼자 빛나서가 아니라 그 많은 사람이 같은 숨으로 움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음에 공연장에 가시면 세 가지만 찾아봐 주시면 좋겠다. 공연 전 악장이 튜닝을 이끄는 순간, 퍼스트와 세컨드가 주고받는 대화, 그리고 공연 끝 지휘자와 악장의 악수. 그리고 그 파도를 뒤에서 바라보며 바순을 불고 있는 사람에게도, 잠깐 눈길을 주시면 더 좋겠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클래식을 소개해요'에 연재한 바이올린 3부작을 에세이로 다시 쓴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역사와 크레모나 장인들, 구조와 송진·사이즈, 악장과 명곡 플레이리스트는 원문에 그림과 영상으로 더 자세히 적어 두었습니다.
바이올린 1편(역사와 스트라디바리우스): https://blog.naver.com/davidchel/224425130715
바이올린 2편(구조와 송진, 비올라와의 차이): https://blog.naver.com/davidchel/224425131358
바이올린 3편(악장과 명곡 플레이리스트): https://blog.naver.com/davidchel/224425132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