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순 자리 바로 뒤에서 불어오는 신의 목소리에 대하여
지난번에는 내 앞자리에 앉는 오보에 이야기를 했다. 합주 내내 그 등과 뒤통수를 바라본다고 썼다. 오늘은 방향을 반대로 돌려 보려 한다. 내 등 뒤에 앉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가면 눈으로 가장 먼저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무대 가장 뒤편 금관 줄에서 세 명, 많게는 네 명의 연주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긴 금속 관을 앞뒤로 쭉쭉 뻗는 장면이다. 객석에서는 그 모습이 칼군무처럼 멋있게 보인다. 바로 앞자리에 앉은 나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그건 태풍이 오기 직전의 풍경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트럼본이다.
트럼본을 그냥 소리 큰 나팔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악기는 음악 역사에서 가장 일찍 완성된 악기 가운데 하나다.
트럼펫이나 호른은 19세기에 밸브가 발명되기 전까지 도, 미, 솔 같은 자연 배음밖에 낼 수 없었다. 수백 년을 고치고 또 고쳐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트럼본은 달랐다. 조상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사크버트(Sackbut)라는 악기인데, 이름이 고대 프랑스어로 밀다(Saquer)와 당기다(Bouter)를 합친 말이다. 이름부터 연주법 그 자체다.
놀라운 건 500년 전의 사크버트와 지금의 트럼본이 구조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밸브가 없어도 슬라이드 하나로 모든 반음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완전체였던 셈이다. 마우스피스와 내관, 바깥 슬라이드, 튜닝 슬라이드, 벨. 분해해서 늘어놓아도 이게 전부다.
다섯 조각으로 나뉘고 키가 빼곡한 바순을 들고 다니는 나로서는, 이 단순함이 조금 부럽다.
클래식 역사의 초기에 트럼본은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교회에 살았다. 이유는 하나,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음과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 이을 수 있고, 음색이 성악가, 특히 테너와 베이스의 목소리와 놀랍도록 잘 섞인다. 그래서 합창단의 성부를 받쳐 주거나 신성한 가사를 돋보이게 하는 자리에 수백 년 동안 머물렀다.
이 성스러운 악기를 심포니 홀로 끌고 나온 사람이 베토벤이다. 그는 교향곡 5번 〈운명〉 4악장에서 승리의 환희를 그리려고 트럼본 세 대를 과감하게 편성했다. 성당에서나 듣던 소리가 교향곡 한가운데서 터져 나왔을 때 관객들이 받은 충격은, 지금으로 치면 클래식 공연장에 일렉트릭 기타가 등장한 것과 맞먹었을 것이다. 베토벤이 트럼본을 '신의 목소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 뒤로 브람스, 말러, 바그너가 트럼본을 적극적으로 쓰면서 지금 오케스트라의 빠질 수 없는 식구가 됐다.
사크버트에서 베토벤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블로그에 사진과 함께 더 길게 적어 두었다. 트럼본 이야기 원문 보러 가기
트럼본에는 누르는 버튼이 없다. 오직 슬라이드의 위치로 음을 바꾼다. 관이 길어지면 음이 내려간다. 슬라이드를 가장 안쪽으로 당긴 자리가 1번 포지션, 가장 멀리 뻗은 자리가 7번 포지션이고, 한 칸 나갈 때마다 반음씩 낮아진다.
문제는 그 일곱 자리에 눈금이 없다는 것이다. 3번이 정확히 어디고 4번이 어디인지, 연주자는 수없이 반복한 연습으로 몸에 새긴 감각과 예민한 귀로 찾아낸다. 그래서 트럼본 연주자들은 현악기 연주자만큼이나 음정에 민감하다. 손가락으로 키를 누르기만 하면 되는 바순 주자인 나로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음을 짚어 내는 저 팔은 언제 봐도 신기하다.
팔이 짧은 연주자를 위한 장치도 있다. 테너 트럼본을 보면 연주자 어깨 뒤쪽으로 둥글게 말린 관과 엄지로 누르는 레버가 달려 있는데, 이것을 F-어태치먼트라고 부른다. 레버를 누르면 바람이 추가된 관을 지나가면서 악기의 길이가 순간적으로 늘어난다. 팔을 끝까지 뻗어야 하는 6번, 7번 자리의 음을 1번, 2번 자리에서 낼 수 있게 된다. 빠른 악구를 연주할 때는 없어서는 안 될 장치다.
오케스트라 악보에서 트럼본 파트는 보통 세 줄로 적힌다. 그런데 셋이 모두 같은 악기는 아니다.
1번과 2번 주자는 주로 테너 트럼본을 분다. 가장 표준적인 음역으로 멜로디와 화음을 모두 맡는,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트럼본 소리의 주역이다. 3번 주자는 베이스 트럼본을 든다. 관이 훨씬 굵고 벨도 크다. 튜바와 함께 오케스트라 소리의 뿌리를 만들고, 테너보다 어둡고 묵직하고 거친 소리를 낸다. 바그너나 말러 교향곡에서 베이스 트럼본이 포효하는 순간은 정말 압권이다. 요즘은 잘 쓰지 않지만, 모차르트나 베토벤 시대의 곡을 할 때는 수석이 테너보다 작고 가벼운 알토 트럼본을 꺼내 들기도 한다.
오케스트라 배치에서 바순 바로 뒤가 트럼본 자리다. 앞에는 오보에의 등이, 뒤에는 트럼본의 벨이 있다. 나는 그 사이에 끼어 앉는다.
트럼본은 음역이 바순과 비슷하다. 그래서 곡을 하다 보면 음이 겹치는 일이 많다. 목관에 바순이 있다면 금관에는 트럼본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평소에는 내 소리 밑을 든든한 화음으로 받쳐 주는 고마운 이웃이다.
그런데 곡이 절정으로 치달아 포르티시모로 내지르는 순간이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바람이 내 뒤통수를 때린다. 귀가 멍해질 만큼 큰 소리다. 그래도 그 압도적인 소리가 오케스트라 전체를 감싸 안을 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전율은 중독성이 있다. 뒷줄 바순 자리만 누릴 수 있는, 조금 시끄러운 특권이다.
연주 중간에 금관 연주자들이 악기 끝의 작은 키를 누르고 바닥에 무언가를 칙칙 빼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침을 뱉는 것처럼 보여 객석에서 살짝 얼굴을 찡그리는 분도 있다. 사실 대부분은 따뜻한 입김이 차가운 금속을 만나 생긴 물이다. 물이 차면 소리가 꼬르륵거리기 때문에, 연주자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다. 물론 침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그건 바순도 마찬가지라 나는 말을 아끼겠다.
트럼본은 약음기, 뮤트도 정말 다양하게 쓴다. 벨을 손이나 뮤트로 막았다 열며 와와 하는 콧소리를 내기도 하고, 컵 모양 뮤트를 씌워 몽롱한 소리를 만들기도 한다.
공연장이나 재즈바에서 트럼본 연주자가 벨 앞에 무엇을 끼우는지 유심히 보면, 소리가 바뀌는 걸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트럼본은 재즈의 역사이기도 해서, 스윙 시대의 토미 도시는 믿기 어려울 만큼 부드러운 고음으로 이름을 날렸고, J.J. 존슨은 트럼본은 둔해서 빠르게 못 분다는 편견을 깼다.
뮤트마다 소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재즈 트럼본 영상까지 블로그 원문에 모아 두었다. 트럼본 이야기 원문 보러 가기
처음 듣는 분께는 두 곡을 권한다. 하나는 트럼본이 얼마나 섬세한지, 하나는 얼마나 사람 목소리를 닮았는지 보여 준다.
말러(Mahler)의 교향곡 3번 1악장. 곡의 초반, 오케스트라가 숨을 죽인 가운데 트럼본 수석이 홀로 아주 길고 느린 솔로를 분다. 알프스의 거대한 자연이 깨어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인간의 깊은 고뇌를 담은 독백 같기도 하다. 트럼본 연주자들의 영원한 로망이자 가장 어려운 오디션 곡이라고 한다.
모차르트(Mozart)의 〈레퀴엠〉 중 '투바 미룸(Tuba mirum)'. 제목에는 튜바가 들어 있지만 라틴어로 나팔이라는 뜻일 뿐, 실제로는 테너 트럼본이 연주한다. 베이스 성악가와 트럼본이 대화를 주고받는데, 심판의 날 죽은 자들을 깨우는 나팔 소리가 공포가 아니라 구원처럼 따뜻하게 들린다. 교회에서 수백 년을 살았던 악기가 왜 사람 목소리를 닮았다고 하는지, 이 곡을 들으면 바로 알게 된다.
여기에 하나를 더 꼽자면, 내 원픽은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다. 금관들이 떼창하듯 불어 대는 그 금속성 파괴력은, 뒤에서 맞아 본 사람으로서 장담하건대 트럼본만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다.
트럼본은 트럼펫처럼 맨 앞에 나서 화려하게 빛나지 않는다. 튜바처럼 땅 밑으로만 다니지도 않는다. 딱 그 중간에서, 때로는 신의 목소리처럼 장엄하게, 때로는 재즈 가수처럼 끈적하게, 또 때로는 코미디언처럼 익살스럽게 얼굴을 바꾼다. 그래서 나는 트럼본을 가장 인간적인 악기라고 부르고 싶다.
다음에 오케스트라 공연에 가시면, 지휘자의 손짓에 맞춰 세 명의 트럼본 주자가 일사불란하게 슬라이드를 뻗는 그 칼군무를 꼭 지켜봐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서, 뒤통수로 태풍을 맞으며 꿋꿋하게 바순을 불고 있는 사람에게도 잠깐 눈길을 주시면 더 좋겠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클래식을 소개해요'에 연재한 트럼본 이야기를 에세이로 다시 쓴 것입니다. 트럼본의 역사와 슬라이드의 원리, 오케스트라 속 트럼본 가족과 명곡 영상은 원문에 사진과 함께 더 자세히 적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