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펫, 내 머리 위를 지나가는 햇빛

바순 자리 바로 뒤에서 나를 겨냥하는 금관의 황제에 대하여

by첼콩델콩

지난번에는 맨 뒷줄의 주춧돌, 튜바 이야기를 했다. 금관 줄의 가장 낮은 곳을 받치는 악기였다. 오늘은 같은 줄의 정반대 끝으로 가 보려 한다. 가장 높은 소리로, 수십 명의 연주를 단숨에 뚫고 나오는 악기.


트럼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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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에서 나는 주로 목관악기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은빛 날개의 플루트, 우수에 찬 잉글리시 호른, 카멜레온 같은 클라리넷, 묵묵한 흙 같은 오보에, 그리고 내 바순까지. 나무가 주는 따뜻하고 섬세한 울림의 세계였다. 트럼펫을 만나려면 그 숲을 벗어나 성벽 위로 올라가야 한다. 차갑게 번쩍이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소리를 내는 금관의 황제, 전장의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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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바순 주자인 나에게 트럼펫은 조금 무서운 악기이기도 하다. 트럼펫은 내 바로 등 뒤에 앉는다. 그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겠다.


저게 다야?

바순 주자 입장에서 트럼펫을 처음 보면 조금 억울하다. 바순은 키가 수십 개고, 손가락으로 막아야 할 구멍도 있고, 리드도 직접 깎아야 한다. 그런데 트럼펫은 버튼 세 개가 전부처럼 보인다. 저게 다야, 싶다.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는 정교한 과학과 사람의 몸이 숨어 있다. 트럼펫의 영혼은 본체가 아니라 작은 금속 조각, 마우스피스에 있다고들 한다. 입술에 닿는 둥근 테두리인 림이 두꺼우면 입술이 편해 오래 불 수 있고, 얇으면 날카로운 고음을 내기에 유리하다. 입술이 들어가는 오목한 컵이 깊으면 어둡고 중후한 소리가, 얕으면 찌를 듯 밝은 소리가 난다.


그래서 트럼펫 연주자들은 자기 입술에 꼭 맞는 '인생 마우스피스'를 찾아 평생을 헤매기도 한다. 리드 하나에 하루 기분이 오르내리는 바순 주자로서는 남 일 같지 않은 이야기다.


버튼 세 개의 마법

트럼펫의 버튼 세 개는 피스톤 밸브다. 버튼을 누르면 공기가 지나가는 관이 길어지고, 관이 길어지면 소리가 낮아진다. 1번은 한 음, 2번은 반음, 3번은 한 음 반을 내린다. 이 셋을 조합해서 모든 음계를 만든다.


손가락은 단순해 보여도 빠른 곡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정확한 조합을 눌러야 해서, 손가락이 꼬이는 일도 흔하다고 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트럼펫을 직접 불어 본 적이 없어서 이 대목은 설명하면서도 자신이 없다. 대신 밸브 원리를 잘 풀어 준 영상과 마우스피스 구조 그림을 블로그에 걸어 두었다. 트럼펫 이야기 원문 보러 가기


화려한 트럼펫 연주자에게도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 있다. 쉬는 마디에 악기를 기울여 '칙' 하고 물을 빼는 모습이다. 뜨거운 입김 때문에 꼬인 관 안에 습기, 사실상 침이 차오르기 때문에 워터키라는 구멍이 꼭 필요하다. 관악기를 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숙명이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조용히 동지애를 느낀다.


전쟁터의 신호에서 무대의 주인공으로

트럼펫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 가운데 하나다. 기원전 1500년경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트럼펫이 나왔다. 그때의 트럼펫은 음악보다 신호를 위한 도구였다. 전쟁터에서 돌격과 후퇴를 알리고, 왕이 입장할 때 권위를 드러냈다. 소리가 크고 멀리 가니까. 성경에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나팔 소리도 트럼펫의 조상이다.


바흐와 헨델 시대의 트럼펫에는 밸브가 없었다. 그냥 긴 쇠 파이프였다. 이 내추럴 트럼펫은 오로지 입술의 힘으로 배음을 골라 소리를 냈다. 그래서 옛날 곡에서 트럼펫이 낼 수 있는 음은 제한적이었고, 멜로디는 아주 높은 음역에서만 나왔다. 그 시절 연주자들의 입술 근육은 지금보다 훨씬 초인적이었을 것이다.


혁명은 1810년대에 왔다. 밸브가 발명되면서 트럼펫도 바이올린처럼 반음계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게 됐다. 하이든과 훔멜 같은 작곡가들의 화려한 협주곡과 함께, 트럼펫은 신호수에서 무대의 주인공으로 올라섰다.


트럼펫도 한 가지가 아니다

트럼펫은 다 똑같은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 않다. 가장 흔한 건 B♭ 트럼펫이다. 재즈와 팝, 밴드, 윈드 오케스트라에서 주로 쓰고, 따뜻하고 풍성한 소리가 난다. 정통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는 C 트럼펫을 많이 쓴다. 관이 조금 짧아서 소리가 더 직선적이고 쨍하다.


한 옥타브 높은 소리를 내는 피콜로 트럼펫도 있다. 크기는 작고 귀여운데 소리는 놀랄 만큼 화려하다. 비틀스의 'Penny Lane' 간주에 나오는 그 맑은 소리가 바로 이 악기다.


트럼펫의 또 다른 매력은 변장이다. 벨에 약음기를 끼우면 소리가 바뀐다. 스트레이트 뮤트를 끼우면 날카롭게 찌르는 소리가, 하몬 뮤트를 끼우면 '왜앵' 하는 코맹맹이 소리가 난다. 재즈 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소리다.


트럼펫 가족과 약음기 사진, 'Penny Lane' 연주 영상은 블로그에 모아 두었다. 트럼펫 이야기 원문에서 트럼펫 가족 구경하기


가장 높고, 가장 뒤에 있는 자

공연장에서 트럼펫을 찾으려면 무대 맨 뒤, 타악기 옆 높은 단에 앉은 사람들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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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단순하다. 소리가 정말, 정말 크기 때문이다. 트럼펫이 지휘자 바로 앞 현악기 자리에서 포르티시모를 분다면 앞줄의 바이올린과 플루트 주자들은 귀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트럼펫은 가장 뒤에서 전체를 감싸며 소리의 균형을 맞춘다.


등골이 서늘한 자리

문제는 그 가장 뒤가 바로 내 뒤라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배치에서 트럼펫은 보통 목관악기 바로 뒤에 앉는다. 그러니까 바순 바로 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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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인 곡에서는 괜찮다. 그런데 말러 교향곡이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음악을 연주하는 날이면 긴장하게 된다. 트럼펫의 벨이 정확히 나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그들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곧 엄청난 음압이 머리 위를 지나간다. 가끔은 귀가 멍해진다.


그래도 부럽다. 바순은 아무리 세게 불어도 묻힐 때가 많은데, 트럼펫은 단 한 번의 소리로 2,000석짜리 홀을 꽉 채운다. 그 한 방이 있는 악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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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펫 소리가 궁금하다면

처음 듣는 분께는 두 곡을 권한다.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장조. 들으면 "아, 이 노래!" 하게 되는 곡이다. 장학퀴즈 시그널 음악의 원곡이기 때문이다. 밸브가 막 등장하던 무렵의 곡이라, 이제 이런 빠른 음계도 다 낼 수 있다고 자랑하듯 우아하고 화려한 기교가 쏟아진다. 3악장의 통통 튀는 멜로디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말러의 교향곡 5번 1악장. 모든 악기가 침묵한 가운데 트럼펫 혼자 "따-다다다 딴" 하고 장송 행진곡을 연다. 트럼펫이 화려하기만 한 게 아니라 얼마나 비장하고 슬픈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곡이다. 트럼펫 연주자들에게는 가장 떨리는 곡 1위로 꼽힌다고 한다.


하나 더 꼽자면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첫머리 '프롬나드'다. 씩씩하면서도 기품 있는 트럼펫 솔로가 미술관 문을 열고, 그림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발걸음을 그린다. 지난번 튜바 편에서 소개한 '비들로'가 들어 있는 바로 그 곡이다. 세 곡의 연주 영상은 원문에 모두 걸어 두었다. 트럼펫 이야기 원문에서 명곡 영상 보기


구름을 뚫는 햇빛

목관악기가 숲속의 바람 소리라면, 트럼펫은 구름 사이를 뚫고 내리는 햇빛 같다. 어디서든 존재감을 숨길 수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화려하게 빛난다.


내 등 뒤에서 귀를 멍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그 시원한 소리가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다음에 오케스트라 공연에 가시면 무대 맨 뒤, 번쩍이는 금빛 악기를 든 연주자들을 찾아봐 주시면 좋겠다. 지휘자의 손끝이 그들을 향하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는 전율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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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바로 앞줄에서 어깨를 살짝 움츠린 채 바순을 불고 있는 사람에게도, 잠깐 눈길을 주시면 더 좋겠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클래식을 소개해요'에 연재한 트럼펫 이야기를 에세이로 다시 쓴 것입니다. 트럼펫의 구조와 음역, 역사, 트럼펫 가족과 약음기, 명곡 영상은 원문에 사진과 함께 더 자세히 적어 두었습니다.


트럼펫 편: https://blog.naver.com/davidchel/2241620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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