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 보호자 | 과음한 다음 날, 아내가 고른 설렁탕 아침
어제 나는 하루를 영어 없이 끝낼 수 있을지 걱정했다. 아들이 만든 한글날 규칙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알았다. 걱정해야 할 건 영어가 아니었다.
어제는 바쁜 휴일이었다. 아침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글을 쓰고, 하루 종일 말을 골랐다. 저녁에는 아내의 지인 가족들과 오랜만에 한자리에 앉았다. 이야기하고 웃다 보니 술잔이 이어졌다. 그리고 꽤 많이 마셨다.
한글날이라고 술 이름까지 우리말로 가려 마시겠다던 사람이다. 이름은 가렸는지 몰라도 양은 가리지 못했다. 한글날 하루만큼은 와인이 금주 대상이라고 큰소리까지 쳐 놓고, 정작 금주를 먼저 깬 건 나였다. 오랜만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술잔을 가볍게 만든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 잔, 오랜만에 웃었으니 또 한 잔. 오랜만이라는 핑계는 몇 번을 써도 닳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말을 고르느라 애쓴 하루의 끝이 술잔이었다니, 기승전결이 영 맞지 않는다.
토요일 아침, 숙취가 남아 있었다. 어제의 술이 아직 퇴근하지 않은 아침이었다.
마흔여덟이 되니 몸이 어제를 꼼꼼하게 기억한다. 젊을 때는 점심쯤이면 술기운이 알아서 빠져나갔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몸이 지난밤 일을 장부에 하나하나 적어 두었다가 아침에 한꺼번에 내민다. 반갑지 않은 성실함이다.
숙취는 묘한 병이다. 아픈 사람이 잘못해서 생긴 병이라 아프다고 말하기가 민망하다. 감기라면 이불이라도 덮어 줄 텐데, 숙취 앞에서는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래,라는 말이 먼저 나와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숙취가 있는 사람은 멀쩡한 척을 한다. 멀쩡한 척하는 얼굴이 제일 멀쩡하지 않다는 건 모른 채로. 게다가 숙취의 가장 오래가는 증상은 두통이 아니라 후회다. 머리는 점심쯤이면 가라앉지만, 어제 왜 그 잔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은 저녁까지 간다.
그래도 부엌으로 가려고 했다. 휴일 아침상은 어느새 내 몫이 되어 있었다. 지난 토요일만 해도 아들 코딩 수업 선발에 늦지 않게 부랴부랴 아침을 차려 내보냈다. 그 버릇이 몸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설렁탕 먹으러 가자."
짧은 말이었다. 이유도 붙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한 문장 안에 필요한 말이 다 들어 있었다. 오늘은 부엌에 서지 말라는 말, 속부터 풀라는 말, 든든하게 먹으라는 말. 그리고 어제 일은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말까지. 마지막 것은 내가 듣고 싶어서 덧붙인 해석일 수도 있다.
나는 부엌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 아내의 아침을 보고, 맛보고, 따라 할 정도는 된다고 은근히 자부하던 참이었다. 그 솜씨를 보여 줄 기회는 오늘 오지 않았다. 제자가 휴강을 신청하기도 전에 스승이 먼저 수업을 취소했다. 취소 사유는 제자의 과음. 사유서를 제자가 써야 하는 이상한 휴강이다.
식당에서 설렁탕이 검은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뽀얀 국물 위에 파가 떠 있었고, 옆 접시에는 김치와 깍두기가 놓였다.
숟가락을 들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지나갔다. 몇 숟가락을 더 뜨자 속이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어제의 술이 한 번에 빠져나가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했다. 말없이 먹는 것. 숙취가 있는 사람에게 가장 정확한 대화법은 숟가락질이다.
해장이라는 말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다. 원래는 해정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술기운을 푼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해장은 무언가를 먹는 일이 아니라 무언가를 푸는 일이다. 어젯밤 단단히 묶어 버린 것을 아침에 하나씩 풀어내는 일. 다행히 한자에서 온 말이라, 어제 아들의 규칙에도 걸리지 않는다.
설렁탕 국물은 뽀얗다. 아무것도 섞지 않은 것처럼 순해 보이는데, 사실은 오래 끓인 시간이 다 그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설렁탕은 간이 거의 안 된 채로 나온다. 소금도 파도 먹는 사람이 알아서 넣는다. 국물의 간은 먹는 사람이 맞추는 음식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조금 달랐다. 국물의 간이야 내가 맞춘다 해도, 오늘 아침 전체의 간은 아내가 먼저 맞춰 두었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먹을지, 부엌에 누가 서지 않을지. 나는 그 위에 앉아 숟가락만 들면 됐다. 내게 남은 결정이라고는 소금을 얼마나 넣을지 정도였다.
아침을 차리는 방법이 꼭 부엌에서 시작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오늘 알았다. 재료를 꺼내 썰고 익히고 담는 것도 아침을 차리는 일이고, 지금 이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고 그걸 먹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도 아침을 차리는 일이다.
오늘 아내는 칼도 냄비도 들지 않았다. 대신 한 문장을 골랐다. 재료로 차리는 아침은 따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보고 차리는 아침은 그 사람을 알아야 한다. 같이 오래 산 사람만 아는 차림법이다. 아내의 아침을 따라 할 정도는 된다던 나는, 이쪽 차림법 앞에서는 아직 첫 장도 펴 보지 못했다.
아니, 한 번은 펴 본 적이 있다. 지난 일요일 아침, 아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했을 때였다. 나는 오늘은 그냥 쉬라고 했다. 그날 아내에게 내가 차려 준 건 아침상 말고도 쉬는 하루였다. 엿새 만에 그 말이 방향을 바꿔 돌아왔다. 이번에는 아내가 나에게, 오늘은 부엌에 서지 말라고 했다. 쉬라는 말은 우리 집에서 그렇게 돌고 도는 모양이다. 다만 그때 내 말은 아내의 컨디션 때문이었고, 오늘 아내의 말은 순전히 내 과음 때문이었다. 주고받은 말은 같은데 사정은 이쪽이 훨씬 민망하다.
아들도 함께 왔다.
별말이 없었다. 아빠가 술을 많이 마셨다고 놀리지도 않았고, 왜 아침부터 밖에 나가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따라와 자리에 앉았다.
어제는 영어를 쓰지 말자는 규칙을 만든 아이였다. 하루 사이에 우리 집 말수가 뒤집혔다. 어제는 아들이 규칙을 만들고 내가 말을 골랐는데, 오늘은 내가 숙취로 말을 잃고 아들이 말을 아꼈다. 둘 다 조용한 아침이었지만 이유는 정반대였다.
아이에게 설렁탕은 해장국이 아닐 것이다. 그냥 토요일 아침에 먹는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다. 같은 식탁에 앉았지만 온 이유는 셋이 다 달랐다. 나는 풀러 왔고, 아들은 먹으러 왔고, 아내는 나를 먹이러 왔다.
아빠의 해장에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동행한다. 이름을 붙이자면 '해장 보호자'쯤 되겠다. 보호자 동의란이 있었다면 아들 이름을 적어야 할 판이다. 해장 보호자의 임무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놀리지 않는 것, 캐묻지 않는 것,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것. 오늘 아들은 그 세 가지를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어제 영어 금지 규칙을 만든 아이답게, 규칙 지키는 데는 아빠보다 한 수 위였다. 아빠 체면은 뚝배기 바닥만큼 내려갔다. 그래도 그 말없는 동행이 싫지 않았다. 아이가 무언가를 알고 따라왔는지, 그냥 설렁탕이 먹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어느 쪽이어도 괜찮다. 이유를 듣지 않아도 고마운 동행이 있다.
설렁탕이라는 이름에는 이야기가 하나 전해진다. 조선의 임금이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국을 끓여 백성과 나눠 먹었는데, 그 탕이 선농탕이 되고 설렁탕이 됐다는 이야기다. 그 임금이 세종대왕이었다는 말도 함께 돈다. 사실인지는 학자들도 의견이 갈린다고 한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 이 말대로라면 우리 집은 이틀 연속 세종대왕 신세를 졌다. 어제는 한글로 하루를 버텼고, 오늘은 세종대왕이 끓였다는 국으로 속을 달랬다. 어제 아들은 세종대왕 편에 서서 영어를 막았고, 오늘 세종대왕은 아빠 편에 서서 숙취를 막아 주었다. 한글날 다음 날 아침 메뉴로 이보다 그럴듯한 게 있을까. 임금이 백성과 나눠 먹었다는 국을, 오늘은 아내가 남편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백성 쪽 자리에 앉은 사람의 처지가 조금 부끄러웠을 뿐이다.
아침 식탁을 기록하는 사람이 오늘은 집 밖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래도 이 아침을 빼놓을 수는 없다. 우리 집 사람이 고르고, 우리 집 사람이 데려가고, 우리 집 사람이 따라온 아침이라면, 식당 식탁 위에 놓여도 그건 우리 집 아침이다. 토요일 아침은 셋이 같이 먹는 날이다. 그 약속은 오늘도 지켜졌다. 식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 집 식탁 대신 설렁탕집 식탁, 아내의 냄비 대신 식당의 뚝배기.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처음 식당에 들어섰을 때보다 몸이 한결 편해져 있었다. 뚝배기 바닥이 보일 때까지 국물을 먹었다.
숙취가 남은 사람의 말은 짧고 흐리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은 여기에 적어 둔다. 술은 어제 내가 마셨는데, 속은 오늘 아내가 풀어 주었다. 잔소리는 나중에 들어도 된다. 아니, 들어야 마땅하다. 다만 오늘 아침만큼은 아내가 잔소리보다 설렁탕을 먼저 골랐다.
어제의 나는 술을 마셨고, 오늘의 나는 해장을 했다. 그 사이에 아내의 한마디와 아들의 말없는 동행이 있었다.
언젠가 아들이 어른이 되어 처음 숙취라는 걸 겪는 아침이 오면, 오늘을 떠올려 주면 좋겠다. 아빠가 술 마신 다음 날, 엄마가 설렁탕집으로 데려가던 토요일. 그리고 그 길에 별말 없이 따라나섰던 자기 자신을. 그날 그 아이 옆에도 누군가 말없이 앉아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다음번에는 술을 조금 덜 마셔야겠다. 이 결심을 지킬 수 있을지는 다음 모임 자리의 내가 알 것이다. 오늘의 나는 일단 다짐만 해 둔다. 더 길게 쓰면 이 글이 반성문이 된다.
적어도 다음 날 아침,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해장 보호자로 모시고 다니는 일은 줄여야 하지 않을까. 이대로 가다간 보호자 수당이라도 챙겨 줘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