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구멍 당구 | 한글날, 아빠가 차린 휴일 아침밥
오늘 우리 집에 새 규칙이 생겼다. 만든 사람은 초등학교 5학년 하랑이다.
"오늘은 한글날이니까 영어 쓰지 말자."
발표는 한 줄이었고, 시행일은 오늘이었다. 공청회도 없었고 가족회의도 없었다. 우리 집 입법 절차는 원래 이렇게 빠르다. 아이가 말하면 그게 법이 된다. 다만 오늘 아침 내가 차린 식탁은 이 법 앞에서 그다지 떳떳한 처지가 아니었다.
여섯 시 삼십칠 분에 눈이 떠졌다. 금요일인데 쉬는 날이라, 이번 주는 주말이 하루 일찍 도착했다.
금요일이면 원래 새벽 여섯 시에 수영장 물속에 있어야 할 몸이다. 오늘은 한글날이라 물속 대신 이불속에서 삼십칠 분을 더 버텼다. 알람이 깨운 것도 아니고 누가 흔든 것도 아니다. 몸이 알아서 고른 시간치고는 숫자가 꽤 구체적이다. 여섯 시 반도 일곱 시도 아닌 삼십칠 분. 휴일의 몸은 시계를 이렇게 대충, 그러나 정확하게 본다. 창밖은 맑았다.
휴일 아침의 부엌은 내 차지였다. 계란을 준비하고, 다진 소고기를 익히고, 안심 스테이크를 얇게 썰고, 야채를 무쳤다. 그걸 한 그릇에 모았다. 같은 소고기인데 한쪽은 잘게 부서져 있고 한쪽은 얇게 누워 있다. 한 그릇 안에 소고기의 두 가지 성격이 같이 담겼다. 다른 접시에는 빵과 호박과 감자와 고구마. 작은 그릇에는 그저께 하랑이 앞으로 바카라과 함께 왔던 자두와 귤. 아내의 지인이 주고 간 것이다. 그리고 비타민 한 포.
접시가 하나씩 채워지자 식탁이 제법 그럴듯해졌다. 휴일이라 셋이 한 식탁에 앉았다. 오늘 아내는 차리는 쪽이 아니라 앉아서 먹는 쪽이었다. 늘 상을 차리던 사람이 맞은편에 앉아 내가 차린 상을 받는다. 그 자리 배치가 오늘 아침 식탁에서 제일 새로운 것이었다. 휴일마다 부엌을 맡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아내의 아침 메뉴는 이제 보고, 맛보고, 따라 할 정도는 된다.
아니, 메뉴도 영어다. 다시 쓴다. 아내의 아침 차림은 이제 보고, 맛보고, 따라 할 정도는 된다. 규칙이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한 번 걸렸다.
'보고'는 쉽다. 매일 아침 식탁에 앉으면 눈앞에 있으니까. 어려운 건 '맛보고'다. 계란이 어느 정도 익었을 때 식탁에 올라왔는지, 고기를 얼마나 얇게 썰었는지, 무침의 간이 어디쯤에서 멈췄는지. 그런 건 눈으로는 안 보이고 혀로만 남는다. 아내가 차려 준 아침을 오래 먹어 온 덕에, 내 혀에는 그 기록이 꽤 쌓여 있었다. 먹기만 한 줄 알았는데 혀가 몰래 받아 적고 있었던 셈이다. 아내의 제법 쓸 만한 제자쯤은 된다고 혼자 자평하는 중이었다. 점수는 내가 매기면 안 되니 보류다. 그런데 그 제자의 식탁 위로 영어 금지령이 떨어졌다.
하랑이의 규칙대로 식탁을 검사해 봤다.
계란, 통과. 다진 소고기, 통과. 야채무침, 통과. 야채무침은 이름 어디를 뒤져도 영어가 한 글자도 없어서 오늘 식탁에서 가장 당당했다. 호박, 감자, 고구마도 무사했다. 땅에서 캐고 넝쿨에서 딴 것들이라 그런지 이름부터 흙 묻은 우리말이다. 자두와 귤도 문제없었다.
걸리는 건 안심 스테이크였다. 스테이크는 누가 봐도 영어다. 오늘만큼은 '안심 구이'로 부르기로 했다. 이름을 바꾸니 갑자기 동네 고깃집 차림표에서 볼 법한 음식이 됐다. 고기는 그대로인데 이름만 한글날에 맞춰 한복을 갈아입었다.
빵은 잠깐 의심받았다. 다행히 빵은 영어가 아니다. 포르투갈에서 일본을 거쳐 건너온 말이다. 먼 길을 돌아 우리말이 됐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빵을 '팡'이라고 부른다. 규칙은 영어만 금지했으니 빵은 무죄로 풀려났다. 법은 언제나 조문을 꼼꼼히 읽는 사람 편이다. 변호인은 나였고, 의뢰인은 끝까지 말이 없었다.
비타민 한 포는 상자에 영어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그래서 오늘은 상자 이름 대신 그냥 '비타민 한 포'라고 부른다. 비타민도 원래 영어 아니냐고 따지면 할 말이 없지만, 규칙을 만든 사람이 아직 그 조항까지는 손대지 않았다. 아침마다 먹던 것을 말 한마디 때문에 식탁에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생각할수록 이 규칙은 까다롭다. 그리고 가장 먼저 곤란해질 사람은 규칙을 만든 본인이다.
하랑이는 게임을 좋아한다. 요즘은 토요일 코딩 수업에도 다니고 싶어 한다. 게임도 영어고 코딩도 영어다. 좋아하는 것 가운데 무사한 건 농구 하나다. 농구는 다행히 한자어다. 농구공도 우리말로 부를 수 있다. 오늘 하랑이는 게임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벌점 위기에 놓인다. 오늘 하루, 우리 집에서 영어를 가장 많이 참아야 하는 사람은 아마 하랑이 일 것이다. 법을 만든 사람이 법에 제일 먼저 걸린다. 그 장면을 상상하니 아침부터 조금 웃겼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하랑이 다운 규칙이다. 하랑이는 바카라을 좋아한다. 그저께는 이모도 고모도 아닌 어른이 바카라을 한 꾸러미 들고 왔을 만큼 바카라을 좋아하는 아이다. 그런 아이가 한글날에 만든 규칙이 말을 가려 쓰자는 것이었다. 바카라 속 글자들과 매일 지내는 아이가 한글날에 내놓은 규칙이라, 웃기면서도 그럴듯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주말이면 하랑이와 이것저것을 같이 한다. 게임을 하고, 포켓볼을 치고, 수영을 하고, 복싱을 하고, 실뜨기와 공기놀이를 한다. 오늘 규칙으로 걸러 보면 게임은 탈락, 포켓볼도 탈락, 복싱도 탈락이다. 수영은 한자어라 살아남았지만 수영장은 오늘 쉰다. 결국 오늘 하랑이와 이름을 마음 놓고 부르며 할 수 있는 놀이는 실뜨기와 공기놀이 두 개뿐이다. 할머니 세대부터 내려온 놀이들이라 이름부터 우리말이다. 오늘만큼은 그게 가장 안전한 놀이다. 실을 손가락에 걸고 주고받는 동안에는 영어가 끼어들 틈이 없다.
아침을 먹고 설거지까지 마쳤다. 그릇을 씻고, 도마를 씻고, 냄비를 씻었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는 규칙을 어길 일이 없었다. 그릇, 냄비, 도마, 개수대. 부엌의 마지막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말로 되어 있다. 차리는 일에는 스테이크 같은 남의 나라 말이 끼어들어도, 치우는 일에는 그럴 틈이 없다. 생각해 보면 한 끼는 상을 차릴 때가 아니라 마지막 그릇을 엎어 둘 때 끝난다. 식탁에 앉아 먹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장면이다. 아내는 그 장면을 매일 넘겨 왔다. 나는 오늘 그 장을 한 번 넘겨 보고서야, 한 끼가 생각보다 길다는 걸 알았다.
요리를 따라 하다 보니 글을 배우는 일과 닮은 구석이 있다. 아이들은 공바카라에 흐리게 인쇄된 글자를 연필로 덧그리며 'ㄱ'을 익히고 'ㅏ'를 익힌다. 처음부터 자기 글씨체를 가진 아이는 없다. 누군가의 글씨를 따라 쓰다가 어느 날 자기 글씨가 생긴다. 나도 아직은 아내의 아침을 덧 그리는 단계다. 흐리게 인쇄된 원본은 아내가 오래 차려 온 식탁이다. 나는 그 위를 꽤 비슷하게 따라 그릴 줄 아는 정도다.
다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글씨는 삐뚤어져도 지우개로 지우면 되고, 맞춤법이 틀리면 고치면 된다. 아침밥은 다르다. 간이 틀리면 첫 숟가락에서 바로 들통난다. 채점하는 입이 셋이나 되고, 그 채점은 숟가락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끝난다. 요리 쪽이 평가가 훨씬 냉정하다.
설거지를 끝내고 그릇의 물기를 털어 엎어 둔 뒤에야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을 준비하면서 머릿속을 지나간 것들을 잊기 전에 붙잡아 두려고. 가족들은 지금 내 마침표를 기다리고 있다.
쓰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아침밥 이야기를 쓰려고 앉았는데 한글날 언어 시험을 보게 생겼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영어 단어가 머릿속을 몇 번이나 지나갔다. 그때마다 하나씩 붙잡아 우리말로 갈아입혔다. 조리법은 레시피가 아니고, 차림은 메뉴가 아니다. 지난 일요일 아내에게 칭찬받았던 내 플레이팅도 오늘은 '담음새'다. 담음새라고 부르니 칭찬이 한 번 더 들리는 것 같다. 갈아입힐 수 없는 몇 개는 그냥 두었다. 다행히 생각까지 금지한다는 조항은 없었다.
한글날 아침을 한글로 적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섞어 쓰던 말들이 오늘은 하나하나 검문을 받는다. 덕분에 문장이 조금 느려졌다. 단어 하나를 쓰기 전에 한 번씩 멈칫한다. 이상하게 그 멈칫하는 순간이 싫지 않다. 매일 쓰는 말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니까.
이 글에 마침표를 찍으면 가족이 다 같이 포켓볼을 치러 가기로 했다.
여기서 또 걸린다. 포켓볼. 이것도 영어다. 우리말로 옮기면 '구멍 당구' 정도가 되려나. 공을 구멍에 넣는 당구. 이름을 바꾸고 나니 어쩐지 동네 문방구 앞 오락기 이름 같다.
저녁에는 아내의 지인 가족들과 오랜만에 만나 술을 한잔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다. 아침 그릇에 올라간 자두와 귤을 건네준 바로 그 사람들 쪽이다. 아침에는 그분들이 건넨 과일을 먹고, 저녁에는 그분들과 한 상에 앉는다. 술잔을 부딪칠 때는 다들 '건배'라고 할 테니 그건 안심이다. 건배는 한자어다. 술 이름도 따져 봐야 한다. 소주와 맥주는 통과. 막걸리는 말할 것도 없다. 와인은 오늘 하루 금주 대상이다. 한글날에는 술도 우리말로 마셔야 한다. 행여 누가 영어로 잔을 들자고 하면, 오늘만큼은 하랑이가 먼저 손을 들지도 모른다.
아침밥은 무사히 끝났다. 남은 건 구멍 당구다. 오늘의 진짜 시험은 아침상이 아니라 그다음부터다.
그런데 구멍 당구를 치려면 큐를 잡아야 한다. 큐도 영어다. 공을 넣는 구멍은 포켓이고, 처음 공을 흩트리는 건 브레이크다. 따져 보니 구멍 당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 굴러가는 놀이다. 큐를 오늘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당구 막대기. 공 미는 막대기. 어느 쪽을 골라도 하랑이가 웃을 것 같다. 점수는 하나, 둘, 셋으로 세면 되니 그나마 다행이다. 숫자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말로 셀 수 있다.
과연 오늘 하루를 하랑이의 규칙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끝낼 수 있을까.
아침밥보다 그게 더 자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