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콜롬보의 비와 홍차

by문성

《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7화. 콜롬보의 비와 홍차

스리랑카 콜롬보에 도착한 아침, 갑판 위에는 짙은 녹색의 해안선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도윤은 가방을 열어 여권과 선내 출입증을 확인했다. 어제 페낭에서 산 나침반도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길을 잃을까 봐 챙긴 건 아니었다. 에블린이 “다음에는 나침반을 가져오라”라고 했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준비 다 됐어요?”

에블린이 객실 복도에서 다가왔다. 가벼운 셔츠에 편한 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얇은 스카프를 둘렀다.

“네. 오늘은 길을 잃지 않을 겁니다.”

“나침반을 챙겼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길을 잘못 들어도 도윤 씨가 바카라임져요.”

“나침반이 바카라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도윤 씨 가방에 있잖아요.”

둘은 함께 배에서 내려 선착장 쪽으로 걸었다. 바깥공기는 따뜻하고 습했다. 항구에는 관광객을 태우려는 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멀리 서는 도시의 소음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에블린은 오늘 하루를 정해진 일정에 맞춰 보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유명한 곳을 빠르게 돌아보는 대신, 콜롬보의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럼 우선 차부터 마시죠. 스리랑카에 왔으니까요.”

“홍차요?”

“스리랑카는 홍차로 유명하잖아요.”

“그건 알아요. 그런데 어떤 차를 골라야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모릅니다.”

에블린이 웃었다.

“그럼 오늘은 모르는 것끼리 같이 찾아보면 되겠네요.”

선착장 근처에서 툭툭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창문 없는 작은 차 안으로 바람과 소리가 그대로 들어왔다. 도윤은 지나가는 거리와 간판을 구경했고, 에블린은 눈에 띄는 건물이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툭툭 운전사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백미러로 보며 무언가를 물었다. 도윤이 알아듣지 못하자 운전사는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고 엄지를 세웠다.

“뭐라고 하신 거예요?”

“제가 알겠어요? 도윤 씨가 말할 차례죠.”

“아마 목적지를 물으시는 것 같은데요.”

도윤이 목적지를 말하자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이번에는 에블린도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뜻일까요?”

“그럴 겁니다. 아니면 제가 방금 목적지를 잘 말한 걸 축하해 주시는 걸지도 모르죠.”

도착한 곳은 거리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작은 찻집이었다. 바깥은 북적였지만, 실내에는 나무 탁자와 찻잎을 담은 유리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벽에는 스리랑카의 차밭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직원이 여러 종류의 홍차를 설명해 주었다. 도윤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국 에블린이 묻는 말에 답을 못했다.

“이건 맛이 어떻게 달라요?”

“향이 좀 더 부드럽습니다.”

“그럼 이건요?”

“그건 조금 더 진하겠죠.”

“도윤 씨, 방금 두 가지 다 진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네.”

직원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웃으며 작은 주전자 두 개를 가져왔다. 한쪽은 향이 부드러운 차였고, 다른 한쪽은 진하고 깊은 맛이 났다. 에블린은 두 잔을 번갈아 마시며 어느 쪽이 더 좋은지 고민했다.

“저는 두 번째가 좋아요. 향이 오래 남아요.”

“저는 첫 번째요.”

“왜요?”

“쓴맛이 덜해서요.”

“도윤 씨는 커피도 달게 마시잖아요.”

“쓴맛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꼭 참아가며 마실 필요는 없다는 거죠.”

에블린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말, 차 말고 다른 일에도 해당되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괜히 힘든 걸 참는다고 더 어른스러운 건 아니니까요.”

“회사에서는요?”

“회사에서는 참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휴가를 왔네요.”

“그건 더는 못 참겠어서요.”

도윤의 말에 에블린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장난스러운 표정이 조금 잦아들었다.

“잘 왔어요.”

그 말은 짧았지만, 도윤은 그 안에 담긴 뜻을 오래 생각했다. 그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에는 쓴맛보다 따뜻한 향이 먼저 느껴졌다.

찻집을 나왔을 때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바람이 불고, 곧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가까운 처마 아래로 뛰어들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젖었고, 차들은 빗물을 가르며 천천히 지나갔다.

“우산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에블린이 말했다.

“오늘은 제가 가져왔습니다.”

도윤은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을 꺼냈다. 우산은 펼쳐졌지만 생각보다 작았다.

“또 하나뿐이네요.”

“크루즈에서 계속 같은 실수를 하고 있군요.”

“우산 크기를 바꾸는 건 실수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둘은 우산을 함께 썼다. 좁은 보도 위를 걷다 보니 어깨가 가까워졌다. 지나가는 툭툭이 물을 튀길 때마다 도윤은 에블린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도윤 씨 어깨가 다 젖고 있어요.”

“괜찮습니다.”

“그러다 감기 걸려요.”

“그럼 스리랑카 차를 더 마시면 낫겠죠.”

“차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에요.”

“오늘은 그렇게 믿어보겠습니다.”

그때 맞은편 골목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작은 음식점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비가 잠시 잦아들자 에블린은 그쪽을 바라봤다.

“저기는 뭘 파는 곳일까요?”

“들어가서 물어보죠.”

가게에서 주문한 음식은 얇고 바삭한 가장자리를 가진 팬케이크처럼 보였다. 안에는 계란이 들어 있었고, 곁에는 향신료가 든 소스가 놓여 있었다. 에블린은 먼저 한입 먹었다가 잠시 말을 멈췄다.

“괜찮아요?”

“맛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매워요.”

그녀는 괜찮은 척 물을 찾았다. 도윤은 얼른 차가운 물을 건넸다.

“괜찮다면서요?”

“괜찮아요.”

“눈이 조금 빨개졌는데요.”

“비가 와서 그래요.”

“실내인데요.”

“실내에도 비가 들어왔나 봐요.”

도윤은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소리를 내고 웃었다. 에블린은 그를 흘겨봤다가, 자신도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은 음식과 차를 천천히 나눠 먹었다. 매운 소스는 도윤이 더 많이 먹었고, 에블린은 마지막 한 조각을 그에게 양보했다.

“도윤 씨가 먹어요. 저는 이미 충분히 맛봤어요.”

“매워서 양보하시는 거죠?”

“그럴 수도 있고요.”

“정직하시네요.”

“오늘은 여행객이니까요. 사장님처럼 보일 필요도 없고, 매운 걸 잘 먹는 척할 필요도 없어요.”

그 말에 도윤은 에블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비가 잦아든 뒤, 두 사람은 다시 항구 쪽으로 향했다. 도윤은 가방 안에서 출입증을 찾다가 나침반을 손에 쥐었다. 뚜껑에 새겨진 새와 파도 문양을 에블린이 알아봤다.

“그 나침반, 페낭에서 산 거죠?”

“네. 혹시 방향이 맞는지 한번 볼래요?”

그는 나침반을 펼쳐 들었다. 바늘이 잠시 떨리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골목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어 도윤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항구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였다.

에블린이 표지판을 가리키며 웃었다.

“나침반보다 표지판이 더 정확하네요.”

“오늘은 나침반이 제 역할을 못 하는군요.”

“그래도 가방에 잘 챙겨 왔잖아요.”

“그건 맞습니다.”

두 사람은 표지판을 따라 걷다가 예상보다 빨리 항구 근처에 도착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배에 돌아갈 여유가 충분했다. 길을 잘못 들 뻔했지만, 덕분에 작은 찻집과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오늘은 운이 좋았네요.”

도윤이 말했다.

“나침반 덕분인가요?”

“아니요. 에블린 씨가 저쪽 표지판을 먼저 봤으니까요.”

“그럼 제 운이 좋았던 거네요.”

“그럴 수도 있죠.”

선착장에 가까워질수록 크루즈의 모습이 커졌다. 에블린은 잠시 걸음을 늦췄다.

“오늘은 계획 없이 걸어서 좋았어요.”

“저도요. 유명한 곳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요.”

“대신 좋은 차를 마셨고, 매운 음식도 먹었고, 비를 피해서 같이 걸었잖아요.”

“제가 우산을 기울여서 어깨가 젖은 것도요.”

“그건 조금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다음에는 우산을 두 개 가져오면 되죠.”

에블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에 오르기 직전, 그녀가 도윤을 불렀다.

“도윤 씨.”

“네?”

“그리스에서도 같이 걸을래요?”

도윤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스까지는 아직 여러 날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워질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때도 길을 잃으면요?”

“그럼 이번처럼 표지판을 찾으면 되죠.”

“나침반은요?”

“나침반은 도윤 씨가 챙기고요.”

에블린은 먼저 배에 올랐다. 도윤은 가방 안의 나침반을 한 번 만져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콜롬보에서 보낸 하루는 짧았다. 하지만 그날 밤, 도윤은 일기장에 항구의 풍경보다 에블린의 웃는 얼굴을 먼저 적었다.

그리고 에블린은 객실로 돌아가 은색 별 브로치를 풀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페낭에서 산 작은 기념품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내일 도윤과 함께 갑판에서 일출을 보기로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배는 다시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음 아침, 두 사람 중 먼저 갑판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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