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갑판 위의 약속

by문성

《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8화. 갑판 위의 약속

밤늦게 도윤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에블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내일 아침 일출 보러 갈래요?’

도윤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답장을 보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갑판에 도착했다.

바다는 아직 어두웠다. 수평선 위로 희미한 푸른빛이 번지고 있었고, 갑판에는 밤새 운항한 배의 낮은 진동만 느껴졌다. 도윤은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봤다.

“오늘은 정말 먼저 왔네요.”

등 뒤에서 에블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속했으니까요.”

“제가 늦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고요?”

“조금은요.”

에블린은 웃으며 도윤의 옆에 섰다. 손에는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커피예요. 도윤 씨는 달게 마신다고 했죠?”

“기억하셨네요.”

“그 정도는 기억할 수 있어요.”

그녀는 커피 한 잔을 건넸다. 도윤은 컵을 받아 들고 향을 맡았다. 따뜻한 커피 향이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퍼졌다.

“에블린 씨는 커피를 안 드세요?”

“저는 차를 가져왔어요. 어제 콜롬보에서 마신 홍차가 생각나서요.”

“그 찻집, 괜찮았죠.”

“도윤 씨가 두 종류를 다 비슷하게 설명한 것만 빼면요.”

“제가 차를 고른 게 아니라 차가 저를 골랐다고 해두죠.”

“그런 식으로 바카라임을 피하는군요.”

“회사에서 배운 기술입니다.”

두 사람은 커피와 차를 손에 든 채 수평선을 바라봤다. 잠시 후 바다 끝에서 주황색 빛이 천천히 올라왔다. 구름 아래로 햇살이 번지더니 잔잔한 물결 위에 길고 가느다란 빛의 길을 만들었다.

“이렇게 조용한 바다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에블린이 말했다.

“배 안에서는 매일 바다를 보는데도, 아침마다 조금씩 다르네요.”

“도윤 씨는 회사에서도 이렇게 조용히 바다를 바라볼 시간이 있어요?”

“없죠. 창문으로 바다를 볼 수 있는 회사도 아니고요.”

“그럼 오늘은 오래 보고 가요.”

도윤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함이 손끝에 전해졌다.

“에블린 씨는 일할 때도 새벽에 일어나세요?”

“마감 전에는요. 편집자들이 원고를 보내면 늦은 밤까지 확인해야 하거든요.”

“사장님도 직접 봐요?”

“제가 만든 잡지니 까요. 마지막까지 확인하고 싶어요.”

“잡지를 만드는 일은 어떤가요?”

에블린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보다, 그 옷을 입고 어떤 기분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유행을 소개하는 건 쉽지만, 누군가가 자기답게 보이도록 돕는 건 조금 더 어려워요.”

“그래서 얼굴을 공개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예요. 제 얼굴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제 얼굴부터 이야기하겠죠. 제가 만드는 것보다요.”

“저는 회사에서 이름보다 직급으로 더 많이 불립니다. 강 대리, 강 대리 하면서요.”

“그럼 도윤 씨도 얼굴보다 직함이 먼저 알려지는 셈이네요.”

“회사 밖에서는 아무도 제 직급을 모르니까 오히려 편합니다.”

에블린은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말이 부럽네요.”

“저는 에블린 씨가 부러운데요. 잡지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잡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오늘 아침에 뭘 할지요. 일출을 보고 나면요.”

도윤은 잠깐 생각했다.

“아침 식사를 하죠. 배가 고픕니다.”

“정말 도윤 씨다운 대답이네요.”

“여행 중에는 잘 먹어야 합니다.”

“그다음은요?”

“산바카라을 하죠. 이번에는 나침반 없이요.”

“길을 잃으면요?”

“표지판을 찾으면 됩니다.”

“콜롬보에서 제가 했던 말이잖아요.”

“좋은 방법은 따라 해도 괜찮습니다.”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바다를 향해 들었다. 잠시 화면을 보더니 도윤에게 물었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돼요?”

“바다를요?”

“바다도요. 그리고 도윤 씨도요.”

도윤은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사진에 잘 나오는 편은 아닙니다.”

“오늘은 사진 모델이 아니라 여행 중인 사람으로 찍을 거예요.”

“그 차이를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자연스럽게 서 있으면 돼요.”

도윤은 난간 옆에 섰다. 에블린은 화면을 맞추다가 손을 내렸다.

“아니에요. 이렇게 찍으면 도윤 씨가 너무 굳어 보여요.”

“카메라 앞에 서면 원래 그렇습니다.”

“그럼 얼굴은 안 나오게 찍을게요. 바다를 보고 있는 뒷모습이면 돼요.”

도윤은 바다 쪽으로 돌아섰다. 에블린이 사진을 찍었다. 셔터 소리가 작게 났다.

“잘 나왔어요?”

“아직 확인 중이에요.”

“마음에 안 들면 지우셔도 됩니다.”

“마음에 들어요.”

에블린은 사진을 보여줬다. 화면에는 아침 바다를 바라보는 도윤의 뒷모습과 난간 위에 놓인 그의 손이 담겨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진 속 풍경은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이 사진을 잡지에 쓰실 건가요?”

“아니요. 제 휴대전화에만 둘 거예요.”

“그럼 제목은 뭡니까?”

“‘약속을 지킨 사람’.”

“너무 거창한데요.”

“약속 시간보다 십 분이나 먼저 왔잖아요.”

“그 정도로 제목을 붙이면 제 인생 사진이 너무 많아질 겁니다.”

“그럼 다음 사진은 제목을 달지 않을게요.”

에블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커피와 차는 어느새 절반쯤 비어 있었다. 해는 점점 높아졌고, 새벽의 푸른 바다는 밝은 은빛으로 바뀌었다.

“오늘 아침은 오래 기억날 것 같아요.”

에블린이 말했다.

“일출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고요. 같이 본 사람이 있어서요.”

도윤은 무슨 말로 답해야 할지 몰랐다. 대신 종이컵을 난간 옆 선반에 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다음에도 같이 볼까요?”

“다음 일출은 언제인데요?”

“그리스에서요. 그때도 일찍 일어나면 되죠.”

“그리스까지 아직 며칠 남았어요.”

“그래서 미리 약속하는 겁니다.”

에블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리스에서 일출을 보죠.”

“이번에도 제가 먼저 나와 있겠습니다.”

“그 약속은 기억해 둘게요.”

그들은 나란히 갑판을 걸어 아침 식당으로 향했다. 도윤은 가방 속에 넣어둔 나침반을 떠올렸다. 오늘은 꺼내지 않아도 길을 잃지 않았다. 바로 옆에 에블린이 있었으니까.

그날 아침, 도윤의 휴대전화에는 사진 한 장이 남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자신의 뒷모습과, 사진 바깥에서 함께 일출을 바라본 에블린의 온기.

그가 그 사진을 다시 보게 되는 날, 둘은 그리스의 어느 항구에 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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