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멈춘 저녁
《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6화. 바람이 멈춘 저녁
페낭에서 출항한 다음 날, 크루즈는 스리랑카를 향해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도윤은 선베드에 누워 바다를 바라봤다. 가방은 옆에 놓여 있었지만, 페낭 골목의 골동품 가게에서 산 나침반은 객실 서랍에 두고 나왔다. 여행 중에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귀중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은 방에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나침반이 그에게는 아직 그저 낡고 작은 기념품일 뿐이었지만.
“그렇게 멍하니 바다만 보면 지루하지 않아요?”
에블린이 다가와 물었다. 밀짚모자에 가벼운 흰색 셔츠 차림이었다. 셔츠 깃에는 페낭에서 산 은색 별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생각이 정리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요?”
“회사 생각이요.”
“휴가 중에도요?”
“메일은 확인하지 않으려고 휴대전화를 객실에 두고 왔는데, 머릿속에 남아 있네요.”
“그럼 바다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인데요.”
“아직 효과가 나타나기 전입니다.”
에블린은 그의 옆 선베드에 앉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의 모자가 흔들렸다. 도윤은 몇 번이나 손을 뻗어 모자 챙을 잡아주려다 멈췄다.
“왜 손을 들었다 내리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 모자를 잡아주려던 거 아니에요?”
“바람이 세서요.”
“그럼 잡아주면 되죠.”
도윤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 순간, 에블린은 먼저 모자 챙을 붙잡았다.
“아, 제가 잡았네요.”
“제가 잡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알아요. 표정에 다 쓰여 있었어요.”
도윤은 괜히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블린은 웃음을 삼키며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갑판을 한 바퀴 걸을래요?”
“좋습니다. 휴가 중 건강 관리도 해야 하니까요.”
“걷는 것도 업무처럼 말하네요.”
“회사에서는 뭐든 일처럼 말해야 살아남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갑판을 걸었다. 바다는 맑고 고요했다. 가끔 바람이 세게 불면 에블린의 셔츠 자락이 날렸고, 도윤은 그럴 때마다 걸음을 조금 늦췄다. 그녀에게 맞춰 걷는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일부러 주변 풍경을 보는 척했다.
점심을 먹고 선내 게시판을 살펴보던 두 사람은 저녁 일정 앞에서 멈췄다. 선장 환영 만찬과 댄스 시간이 예정되어 있었다. 안내문 아래에는 ‘정장 또는 세미포멀 복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에블린이 말했다.
“저녁에 만찬이 있네요.”
“재킷을 입어야겠군요.”
“정장까지는 아니어도 깔끔하게 입으면 될 거예요.”
도윤은 객실에 걸어둔 재킷을 떠올렸다. 회사에서 입던 옷이라 여행 가방 속에서도 구겨지지 않게 신경을 썼지만, 그래도 상태가 걱정됐다.
“그 재킷이 무사하길 바라요.”
“왜요?”
“어제 가방 정리할 때 얼핏 봤는데, 옷이 꽤 단단히 접혀 있던데요.”
“재킷은 욕실에서 김을 쐬게 하면 괜찮습니다.”
“그런 방법도 있어요?”
“급할 때 쓰는 방법입니다. 무역회사 해외영업팀의 생존 기술이죠.”
“그 회사에서는 별걸 다 가르치나 봐요.”
“퇴근 전에 갑자기 회의가 잡히면 많은 걸 배우게 됩니다.”
에블린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럼 저녁에 봐요. 늦지 말고요.”
“이번에는 제가 먼저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 기억할게요.”
도윤은 객실로 돌아와 재킷을 꺼냈다. 예상대로 어깨와 소매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욕실에 뜨거운 물을 틀고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두자, 김이 차오르며 주름이 조금씩 펴졌다. 그사이 도윤은 넥타이 매는 법을 휴대전화로 찾아봤다.
영상 속 사람은 몇 초 만에 매듭을 완성했지만, 도윤은 세 번을 다시 하고서야 겨우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다.
저녁 일곱 시, 만찬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 에블린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도윤은 시계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기다리는군.”
그가 혼잣말을 하는 사이 에블린이 들어섰다. 짙은 남색 드레스에 얇은 은색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지만, 그녀가 걸을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도윤은 준비해둔 말을 잊었다.
에블린이 그의 재킷을 살피며 말했다.
“재킷은 무사하네요.”
“욕실에서 한 시간 동안 찜질을 시켰습니다.”
“재킷이 꽤 고생했겠어요.”
“그래도 오늘은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녀의 시선이 넥타이 매듭에 머물렀다.
“매듭이 조금 비뚤어졌어요.”
“계속 고쳤는데 더 이상해졌습니다.”
“가만히 있어 봐요.”
에블린이 한 걸음 다가왔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어깨에 힘을 줬다. 그녀가 넥타이 매듭을 바로잡으려 손을 올리자, 손끝이 셔츠 깃에 닿았다.
“숨을 참을 필요 없어요.”
“제가 숨을 참았습니까?”
“어깨가 굳었잖아요.”
“넥타이가 조여서 그런 겁니다.”
“제가 조이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네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농담이에요.”
에블린은 매듭을 반듯하게 고쳐주고 한 걸음 물러섰다. 도윤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괜찮네요.”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회사에서도 넥타이 매주는 사람이 있어요?”
“회사에서는 넥타이보다 보고서를 더 많이 고쳐줍니다.”
“오늘은 보고서가 아니라 다행이네요.”
만찬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둥근 테이블마다 촛불이 놓여 있었고, 창 너머로는 저녁 바다가 어둠 속에 잠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음식이 차례로 나왔다. 에블린은 메뉴를 살피며 재료를 맞혀보려 했다. 첫 번째 요리를 맛본 뒤 그녀가 말했다.
“이건 생선 요리 같아요.”
“맞습니다.”
“어떤 생선인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모릅니다.”
“아까부터 자신 있게 맞장구치더니, 정작 아는 건 없네요.”
“맛있다는 건 압니다.”
“그건 인정해요.”
그들은 음식을 천천히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에블린은 잡지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었다. 루미에르를 만들기 전에는 작은 출판사에서 일했고, 잡지가 자리를 잡기까지 편집부터 광고 영업까지 직접 챙겼다고 했다.
“사장님이면 직원들이 다 알아보지 않나요?”
“회사 안에서는요. 하지만 제 얼굴을 공개하지 않아서 밖에서는 잘 몰라요.”
“불편하지 않습니까?”
“처음엔 편했어요. 잡지보다 제 얼굴이 먼저 알려지는 건 원하지 않았거든요.”
“지금은요?”
에블린은 촛불을 바라봤다.
“가끔은 누군가가 직함이나 잡지 이름 말고, 그냥 저를 알아봐줬으면 해요.”
도윤은 잠시 대답을 고르느라 입을 다물었다. 에블린은 그의 표정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죠?”
“네. 함부로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게 오히려 좋네요.”
“저도 아직 에블린 씨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까요.”
“그럼 천천히 알아가면 되겠네요.”
그 말에 도윤은 포크를 잠시 내려놓았다. 에블린은 아무렇지 않게 물잔을 들었지만, 도윤에게는 방금 한 말이 오래 남았다.
식사가 끝나자 무대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몇몇 승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에블린이 손을 내밀었다.
“춤출 줄 알아요?”
“회식 자리에서 박수 치는 법은 압니다.”
“그건 춤이 아니잖아요.”
“제 춤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못 춘다는 말이네요.”
“정확합니다.”
“그럼 오늘 배우면 되겠네요.”
도윤은 잠시 망설였다. 에블린은 손을 내민 채 재촉하지 않았다.
“못 추면 웃으실 겁니까?”
“조금은요.”
“그럼 더 못 추겠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잘 추는 편은 아니니까.”
도윤은 결국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무대 한쪽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다른 승객들의 움직임을 따라 한 걸음씩 옮겼다. 한 발, 다음 발. 도윤은 음악보다 에블린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러다 결국 그녀의 발을 밟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구두가 튼튼해요.”
두 번째에는 방향을 바꾸다가 팔꿈치가 부딪쳤다. 세 번째에는 박자를 놓쳐 에블린을 엉뚱한 쪽으로 이끌었다.
“도윤 씨, 지금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침반을 가져왔어야죠.”
“객실에 두고 왔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었군요.”
“춤에서도 길을 잃을 줄은 몰랐습니다.”
에블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도윤도 따라 웃었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서로의 발을 밟고 박자를 놓치면서도 두 사람은 춤을 멈추지 않았다.
음악이 끝났을 때 에블린이 말했다.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정말요?”
“제가 몇 번 밟혔는지 세는 걸 포기한 것만 빼면요.”
“그럼 꽤 많이 밟혔군요.”
“다음에는 나아질 거예요.”
“다음에도 가르쳐주실 겁니까?”
“도윤 씨가 신청하면요.”
도윤은 대답 대신 웃었다. 다음이 있다는 말이 생각보다 기뻤다.
만찬이 끝난 뒤 두 사람은 갑판으로 나왔다. 밤바람이 불었다. 선내의 음악 소리는 문이 닫히자 조금씩 멀어졌다. 바다 위로 달빛이 길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에블린이 말했다.
“발을 밟았는데도요?”
“그게 제일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다음에는 밟지 않겠습니다.”
“그럼 오늘보다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도윤은 난간에 팔을 올렸다. 에블린도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사람들이 대표님 얼굴을 잘 모른다는 건 편하겠어요. 어디서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으니까요.”
“처음에는 그랬어요. 지금은 가끔 누군가가 저를 알아봐 줬으면 해요.”
“오늘처럼요?”
“오늘 제가 춤을 못 춰도 같이 웃어준 것처럼요.”
“그건 춤이 아니라 길을 잃은 거였습니다.”
“그래도 같이 있었잖아요.”
도윤은 그 말에 잠시 시선을 내렸다. 바다 위의 달빛이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에는 나침반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럼 길을 잃지 않겠네요.”
“춤은 여전히 못 출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제가 감수할게요.”
에블린은 객실 쪽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가다가 돌아보며 말했다.
“잘 자요, 도윤 씨.”
“좋은 밤 보내세요.”
그녀가 문 안으로 사라진 뒤, 도윤은 조금 더 갑판에 머물렀다. 그러다 객실로 돌아와 서랍을 열었다. 페낭에서 산 나침반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바늘은 조용히 흔들리다 한쪽을 가리켰다. 배가 항로를 바꾼 탓일지도 몰랐다. 도윤은 잠시 바라보다가 나침반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 아침, 식당 앞에서 만난 에블린이 그의 재킷을 보며 물었다.
“오늘은 나침반을 챙겼어요?”
“네. 가방에 넣어둘 겁니다.”
“오늘은 길을 잃지 않겠네요.”
“제가 길을 잃어도 같이 찾아주실 거잖아요.”
에블린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날 두 사람은 스리랑카에 도착하기 전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도윤은 아직 알지 못했다. 페낭의 작은 골동품 가게에서 산 나침반이, 언젠가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길을 가리키게 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