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환불 불가

by문성

《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1화. 환불 불가

“고객님, 출발 사흘 전이라 취소 수수료가 전액 발생합니다.”

전화기 너머 상담원의 목소리는 친절했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

“전액이요? 배는 아직 항구에 있잖아요.”

“예약하신 상품의 약관에 따라—”

“약관은 제가 읽었고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전화한 겁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싱가포르의 습한 공기를 길게 들이마셨다. 휴가를 앞두고 충동적으로 예약한 크루즈였다. 싱가포르에서 출발해 말레이시아와 스리랑카를 거쳐 유럽에 닿는 11박 12일. 그런데 막상 출발일이 다가오자 회사 생각이 났고, 집 생각이 났고, 무엇보다 혼자 배를 타고 열흘 넘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두려워졌다.

그래도 취소는 안 됐다.

대리라는 직함은 명함에만 있었다. 무역회사에서 그의 실상은 급한 서류를 나르고, 상사의 점심을 예약하고, 거래처에 늦은 답장을 보내는 말단 직원이었다. 이번 휴가만큼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있고 싶었다. 막상 그곳에 가려니, 이번엔 자신이 그곳을 피하고 싶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자.”

그는 여행 가방 손잡이를 쥐고 승선장으로 향했다.

크루즈선은 생각보다 컸다. 흰 선체가 항구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승객들이 하나둘 탑승하는 사이, 검은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목까지 올라오는 스카프 때문에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여자의 작은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저기요,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여자가 돌아섰다. 잠깐, 선글라스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고마워요.”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여자는 카드를 받아 들더니, 그가 무슨 글자인지 읽기도 전에 재빨리 가방 속으로 넣었다.

두 사람은 같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여자는 8층 버튼을 눌렀고, 그는 8층 버튼을 눌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여행 오셨어요?” 그가 물었다.

“그렇게 보이나요?”

“짐이 있으니까요.”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웃은 건지, 비웃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방에 들어온 지 십 분쯤 지났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방금 만난 여자를 조심하세요.
그녀는 이 배에 타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장난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손가락은 이미 답장을 누르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답은 오지 않았다.

대신 복도에서 급한 발소리가 멈췄다. 누군가 그의 방문 앞에 선 듯했다. 그리고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까 그 카드요. 당신, 그걸 봤죠?”

그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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