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아버지에 대한 엇갈린 기억에서 대상관계를 생각하다

by바람 wind air wish

우리 아버지는 광부셨다.

평생 탄광에서 일하셨고, 그 대가로 진폐증을 얻으셨다. 석탄을 캐기도 하셨지만, 갱도를 만들기 위해 발파하고 나무로 기둥을 세우는 일을 더 많이 하셨다고 했다. 발파 작업 중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를 당해 발목에 철심을 박고 평생 사셨으며, 폐에 쌓인 것도 석탄가루보다 돌가루가 더 많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얻은 진폐증으로 30년이 넘는 세월을 병원에 입원해 지내시다가 2년 5개월 전 돌아가셨다.


그런데 내게는 아버지와 관련해 오래도록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이 하나 있다.


청년 시절 알게 된, 내게는 아버지 같은 지인분이 아버지와 같은 고향 출신이셨다.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그분은 당시 고향을 떠나 계셨고, 우리 아버지도 그분을 학사모를 쓴 사진 속 모습 정도로만 기억하고 계셨다.


두 집안이 한 동네에 살았던 것은 맞았다. 하지만 내가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는 단순했다.


우리 집은 산 위쪽에, 그분의 집은 조금 아래쪽에 있었다. 그분의 아버지는 광부가 아니라 배추농사를 지으셨고 부모님이 그 집에 몇 번 놀러 간 정도였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분의 기억은 전혀 달랐다.


그분은 여러 차례 자신의 아버지가 전문적인 기술자였고, 우리 아버지는 그 밑에서 일을 배우던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셨다.


처음에는 기억이 잘못되었나 보다 했다. 사람의 기억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만날 때도,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도, 심지어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반복되었다.


그때 우리 육 남매는 많이 속상해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단순한 기억의 오류 이상의 불편함을 느꼈다.

설령 그분의 기억이 사실이라고 해도 왜 공식적으로 고인을 추억하는 자리에서까지 굳이 누군가의 밑에서 일을 배웠던 사람으로 기억해야 했을까.


당시에는 속상했고 화도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은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얼마 전,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또 그 이야기를 하셨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화가 나지 않았다. 대신 궁금해졌다.


‘사람은 왜 사실과 다른 기억을 그렇게 오래 확신할 수 있을까?’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기억이 사진처럼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를 그대로 꺼내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통해 다시 기억한다. 그래서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고, 반복해서 말하는 동안 오히려 더 단단해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기억이 시간이 지나며 ‘우리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기술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로 변했을 수도 있다. 그 이야기를 오랫동안 반복하다 보면 자신이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인지, 스스로 만들어낸 연결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하지만 내게 더 흥미로웠던 것은 기억의 정확성보다 그 기억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모양이었다.


그분의 이야기 속에서 그분의 아버지는 늘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우리 아버지는 배우는 사람이었다. 그분 자신도 오랫동안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종종 자신이 그들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하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대상관계이론이 떠올랐다.


대상관계이론에서 말하는 ‘대상’은 물건이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마음속에 저장하고, 그 관계의 방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오래 자리 잡은 관계의 틀을 통해 보기도 한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나는 이끄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배우는 사람이다.’


만약 이런 자기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면, 과거의 관계도 그 틀에 맞게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그분이 의도적으로 우리 아버지를 낮추려고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분에게는 오히려 좋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와 저분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분을 도와주었다.’


‘세월이 흘러 그 딸과 내가 다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꽤 아름다운 인연 이야기다.


문제는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사람은 늘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결코 작지 않다.


대상관계이론을 공부하면서 나는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저 사람은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을 어떤 위치에 두고 있을까?’


‘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 놓은 관계의 틀 속에서 보고 있을까?’


기억의 왜곡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내게 유리한 장면은 더 잘 기억하고, 부끄러운 장면은 작게 기억할 수 있다. 상처받았던 기억은 크게 남고, 내가 누군가에게 주었던 상처는 쉽게 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어느 한 사람의 잘못된 기억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과거를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내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피해자이고 상대는 언제나 가해자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내가 원하는 역할 속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돕는 위치에 있을 때, 그 사람의 삶까지 내 공로로 만들어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잘못을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왜 저 사람에게는 저 이야기가 그렇게 필요한 기억이 되었을까?’


나는 이제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도 예전처럼 화가 나지는 않는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굳어져 온 하나의 관계 이야기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 역시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사람을 보고 있지는 않은지, 믿고 싶은 기억만 진실이라고 붙잡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한다.


대상관계이론을 공부하며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사람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이 아니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하는 대신, 한 사람이 왜 그런 관계를 만들고, 왜 같은 상처를 반복하며, 왜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수정하지 못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 이해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기억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일보다, 내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 또한 완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오늘 만나는 사람을 과거의 누군가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대상관계이론을 공부하며 배우고 싶은 가장 중요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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