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 나는 그 산에서 처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그해 부모님은 강원도 함백에서 광부들의 밥을 해주는 일을 하고 계셨다. 그곳을 사람들은 ‘900항’이라고 불렀다.
정확히 어떤 의미로 그렇게 불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 기억 속 900항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깊은 산속에 몇 채의 집이 덩그러니 놓여 있던 곳이었다.
예미에서 900항까지는 제대로 다니는 차편도 없었다.
지나가는 새비재로 가는 배추차나 사북으로 가는 탄차를 얻어 타고 내려서도 한 시간쯤은 더 깊은 산속으로 걸어가야 했었다.
처음 그곳에 갈 때는 세 살 위 언니와 함께였다.
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예미역에 내려, 언니와 함께 낯선 곳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두 딸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강원도 깊은 산속으로 보내셨다는 것이 조금 아찔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빠가 알려준 대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고, 모르면 사람들에게 물어가면서, 결국 언니와 나는 무사히 그곳을 찾아갔다.
산속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것은 여섯 살짜리 남동생이었다.
한동안 우리를 못 봐서였는지 누나들을 보자 놀라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쫑’이라는 강아지가 있었다.
쫑과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산에는 머루와 다래, 산딸기와 오디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쫑과 함께 산을 뛰어다니며 열매를 따먹고, 잠자리를 수도 없이 잡아 쫑에게 먹였다.
쫑은 우리가 화장실에 가면 밑에서 기다릴 만큼 우리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린 나는 그런 쫑이 너무 우습고 너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고모부가 오셔서 진폐증이신 아버지에게 보신탕이 몸에 좋다며 쫑을 잡았다.
어린 우리들 눈앞에서 쫑이 나무에 매달리고 불에 그슬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 큰 충격이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울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도 결국 그 보신탕을 드시지는 못했다.
그날 이후 900항의 산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내 기억 속에는 쫑을 잃었던 슬픔도 함께 남았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나는 마냥 아이로만 살 수는 없었다.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예미를 수없이 오가야 했다. 그때마다 커다란 탄차를 얻어 타기도 하고, 강원도의 혹독한 겨울 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오토바이를 얻어 타기도 했었다.
어느 날은 부모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내가 광부 아저씨들의 점심을 준비해야 했다.
밥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요리도 할 줄 몰랐다.
무엇을 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가 무를 채 썰어 맑은 뭇국을 끓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 여러 명의 어른들에게 중학교 1학년 아이가 끓인 뭇국을 내놓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저씨들은 아무 말 없이 잘 드셔주셨다.
아버지는 내게 더 먼 심부름도 시키셨다.
진폐증 인정을 받기 위해 필요한 서류가 있다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청주 병무청에 가서 서류를 떼오라고 했다.
나는 또 혼자 갔다.
그 일을 무사히 끝내고 나니 이번에는 쌀을 주셨다.
이 쌀을 팔아 차비를 마련해서 서울 용산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에 가서 또 다른 서류를 떼오라는 것이었다.
쌀을 들고 쌀집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할 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쌀집 주인은 혹시 내가 훔쳐온 쌀은 아닌지 아버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했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다.
지하철에서 혼자 길을 묻고 다니는 아이가 이상해 보였는지 한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분은 손수 나를 삼각지까지 데려다주셨다.
그리고 점심으로 짬뽕도 사주셨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의 친절은 지금도 기억난다.
육군본부에 도착하니 보초를 서고 있는 헌병이 있었다.
나는 또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설명했다.
그렇게 ‘조수대’라는 성함을 가지진 분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은 내게 필요한 서류를 챙겨주셨다.
그리고 물었다.
“집에 갈 차비는 있니?”
기차를 탈 때 자기 이름을 대면 그냥 태워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또 무사히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이 어린아이에게 시키기에는 너무 큰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키면 했고, 가라면 갔고, 무서워도 길을 물었고,
어떻게든 해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해를 떠올리면 힘들었다는 기억보다 아름다웠다는 기억이 먼저 난다.
아마 나는 900항에서 보낸 짧은 6개월의 시간을 통해 자연이 이렇게도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 리라.
누가 심지 않아도 열매가 열리고, 누가 가꾸지 않아도 꽃이 피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지금 내가 산을 좋아하고, 걷는 것을 좋아하고, 낯선 길을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도 어쩌면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 가족들과 사북 하이원리조트에 갔었다.
그곳에서 케이블카를 타며 옛 광부의 길인 '운탄고도'라는 옛 탄차가 다니던 길을 만났다. 아마 900항은 지금의 운탄고도 트레킹 중 4~5길쯤 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 이름의 뜻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았던 900항은 해발 900m쯤 되는 곳에 있는 곳이라 그렇게 불렸다고 했다.
수십 년 동안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이름 하나가 뒤늦게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900항은 이제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그곳의 집들도, 광부 아저씨들도, 누렁이 똥개 쫑도, 내가 뛰어다니던 길도 모두 사라졌다.
지금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이미 사라진 탄광촌의 이름일 뿐이겠지만, 내게 900항은 사라진 곳이 아니다.
너무 일찍 어른의 일을 해야 했던 아이가
잠시 산을 뛰어다니며 야생의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던 곳이다. 기회가 된다면 나는 꼭 운탄고도 길을 걸어보고 싶다.
오래전 탄차가 오가던 그 깊고 조용한 산길을 천천히 걸으며, 그 시절의 나를 하나씩 기억해보고 싶다.
탄차를 얻어 타던 아이,
쫑과 함께 산을 뛰어다니던 아이,
머루와 다래를 따먹던 아이,
무서워도 혼자 길을 찾아가던 아이.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길이라기보다,
오래전 그 산에 두고 온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 될 것 같다.
900항은 이제 사라졌지만,
내 기억 속에는 아직 그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