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살의 크리스마스

학교는 떠났지만 배우고 싶은 마음까지 놓지는 않았다.

1985년 12월 25일, 나는 처음으로 공장에 갔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누군가는 성탄절 선물을 주고받고, 누군가는 겨울방학을 기다리며 들떠 있었을 그날, 나는 옷을 만드는 봉제공장의 견습생이 되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왜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였을까.

그해 여름까지만 해도 나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특별히 공부를 잘하지는 않았다. 다만 입학 전 반편성 시험을 앞두고 처음으로 문제집 한 권을 사서 공부했는데 687명 중 8등을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나도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아이구나.’

친구들도 생겼고, 학급부장도 했다. 학교에 가는 일이 즐거웠고,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내가 행복해지는 것과 집안 형편이 좋아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다 진폐증을 앓게 되었고, 엄마 혼자 벌어서는 살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전액장학금을 주며 계속 공부하게 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장학금이 문제가 아니라 집에 돈 벌 사람이 없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바라보면 조금 마음이 아프다.

공부가 그렇게 좋았으면서도 왜 한 번쯤 “나는 학교 다니고 싶어요”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아마 그때의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집안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익숙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성탄절에 공장으로 갔다.

처음 맡은 일은 당시 ‘구찌’라고 부르던 작업이었다. 옷의 주머니가 들어갈 부분을 가위로 정확하게 잘라내는 일이었다.

나는 손끝이 야물었던지 그 일을 꽤 잘했다.

그런데 일을 잘한다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공장에서는 내가 구찌를 잘하니 계속 그 일만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은 늘 미싱을 향하고 있었다.

틈이 날 때마다 미싱을 조금씩 연습했다. 그래도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자 결국 미싱을 시켜주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 나이에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결국 미싱 앞에 앉을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난 미싱공이 되었다.

공장생활은 힘들었고 야간작업과 철야도 많았다.

그런데 공장에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저녁이 되면 그 아이들이 바카라가방을 들고 학교로 간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나도 공부하려고 야학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정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야간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중학교 과정은 마지막 3학년 2학기 한 반만 남아 있었다.

이름이 ‘장미반’이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 1학기 성적표 하나를 들고 그 반에 들어갔다.

그렇게 갑자기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네 달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야간고등학교에 가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저녁을 굶고 밤 10시가 넘어 집에 돌아오면 난 늘 배가 고팠다.

돌이켜보면 나는 공부를 잘했던 아이이기 전에 공부를 하고 싶었던 아이였던 것 같다.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지만 배움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쉰을 훌쩍 넘긴 지금도 나는 다시 학교에 다니고, 시험을 준비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이 좋다.

누군가는 이 나이에 왜 그렇게까지 공부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공부는 늦게 생긴 욕심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지만 삶의 형편 때문에 자꾸 뒤로 밀려났던 마음이다.

열세 살의 크리스마스에 나는 교복 대신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갔다.

하지만 배우고 싶었던 마음까지 그곳에 두고 오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그 아이가 끝내 놓지 않았던 공부를

조금씩 다시 이어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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