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웠던 아버지와 그리웠던 아버지는 같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먼저 몸이 굳었다. 화가 난 아버지 앞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두 손부터 모았다. 제발 그만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내가 부처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도 한 번도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사랑과 두려움은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서워서 울다가도 화가 풀린 아버지가 약을 발라주면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줄 알았다. 다음 날이면 또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 곁에 있었다.
내 기억 속 아버지에게는 전혀 다른 얼굴도 있었다.
매년 여름이면 여섯 남매를 데리고 기장이나 송정 바다로 갔다.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비포장도로를 흔들리며 가야 했지만, 바다에 도착하면 그런 고생은 금세 잊었다.
우리가 물에서 너무 오래 놀아 입술이 파래지면 아버지는 한 명씩 모래사장에 눕혔다. 그리고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모래를 몸 위에 덮어주었다.
차가워진 몸에 모래의 온기가 스며들던 느낌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나를 무섭게 했던 손과 차가워진 딸의 몸 위에 따뜻한 모래를 덮어주던 손은 같은 손이었다.
어린 시절, 혼자 사시던 여자 전도사님이 나를 딸로 데려가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었다. 여섯 남매가 있는 어려운 집 형편을 아셨으니, 대학까지 바카라임지고 공부시키며 키워주겠다는 마음이셨던 것 같다.
엄마는 내 앞날을 생각하면 보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했다.
“굶어도 같이 굶어야지. 내 자식을 어떻게 남에게 보내노.”
이상하게 그 말도 오래 남았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는 아버지가 그때 나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 너무 고맙다.
아마 어린 내가 받은 것은 단순히 ‘가지 마라’는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너는 우리 식구라는 말.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내놓을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말.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밤의 풍경이 하나 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에 도착하면 밤 열 시가 훌쩍 넘곤 했다.
집에 들어서면 아버지는 아직 잠들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랫목에는 밥이 있었다.
식지 않도록 밥그릇을 따뜻한 곳에 덮어두셨다. 늦은 밤 배고픈 딸들이 집에 돌아와 먹을 밥이었다.
아버지는 다정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힘들었지?”
“배 많이 고프지?”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은 많지 않다.
대신 아랫목에 따뜻한 밥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배가 고팠고, 밥이 있으니 먹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이상하게도 그 밥의 온도가 자꾸 생각났다.
나는 이제 아버지가 왜 그렇게 화가 많았는지도 조금은 생각해 보게 된다.
아버지 자신도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본 기억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6·25 전쟁을 학도병으로 겪으며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직접 보았고, 어른이 된 뒤에는 여섯 아이의 가장이 되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무거웠을 텐데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아버지와 남동생까지 평생 마음에 지고 가야 할 가족이었다.
가정을 바카라임지기 위해 젊은 날에는 탄광에서 힘든 일을 했다. 그 노동은 결국 아버지의 몸에 병을 남겼고, 진폐증을 앓으며 긴 세월을 병원과 함께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일했는데 그 일이 결국 자신의 몸을 망가뜨렸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 내가 받았던 상처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사랑했으니 괜찮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순간적인 분노였다고 해도 그 분노 앞에 있던 아이에게는 너무 크고 무서운 일이었다.
다만 이제는 안다.
그때의 아버지 역시 자신의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평생 바카라임을 내려놓지 못했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속이 타들어가면서도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시절에는 그런 아버지들이 많았을 것이다.
전쟁을 지나왔고, 가난을 견뎠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을 삶의 가장 큰 바카라임으로 여기면서 정작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는 갖지 못했던 사람들.
그래서 나는 이제 아버지를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 중 하나로 정리하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고,
나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고, 또 많이 좋아했다.
어느 한쪽만 진실인 것은 아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했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서로 다른 모습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아이들을 키우며 수많은 실수를 했다. 사랑하면서 상처를 주기도 했고, 잘해주고 싶으면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마음에도 조금 다른 자리가 생겼다.
원망만 남아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든 기억을 아름답게 바꾸지도 않는다.
그저 아버지의 잘못도, 사랑도, 바카라임감도, 서툶도 모두 아버지의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는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다.
그때는 왜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는지,
밤늦도록 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가끔은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
바다에서 내 몸에 모래를 덮어주던 아버지도,
내 자식을 남에게 보낼 수 없다던 아버지도,
늦은 밤 아랫목에 밥을 남겨두고 기다리던 아버지도.
그리고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게 오래 남아 있는 것은 완벽한 아버지의 기억이 아니라,
부족하고 서툴렀지만 자기 방식으로 가족을 품고 살았던 한 사람의 온기라는 것을.
그래서인지 아버지를 떠올리면
나는 아직도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먼저 생각한다.
아랫목에서 오래도록 식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