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에서 발견한 것들

오목한 마음으로 빚어내는 하루

by진정


비워야 비로소 담아낼 수 있는 것들


보글보글 끓인 찌개를 불에서 내릴 때, 어떤 그릇에 담을지 고민하곤 해요. 투박한 뚝배기냐, 매끈하고 모던한 느낌을 주는 그릇이냐에 따라 같은 음식도 전혀 다른 온도와 향기를 내니까요. 요리의 진짜 완성은 알맞은 그릇에 음식을 정성껏 옮겨 담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찬장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릇을 골라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귀한 그릇이라도, 그 속이 텅 비워져 있지 않으면 완성된 요리를 조금도 새로 담을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무언가를 오롯이 품고 안아주려면, 먼저 나를 비워내야 한다는 담백한 진리를 부엌의 그릇들에게서 배웁니다. 쏟아지는 정보와 물건, 마음의 짐까지 채워 넣는 것에만 익숙해져 정작 덜어내는 일에는 서툴러진 일상을 조용히 돌아보게 되는 순간입니다.


결핍이 아닌 여백, 상실이 아닌 가능성


식탁 앞에 앉아, 가장 손때가 많이 묻은 둥근 그릇을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싸 쥐어 봅니다. 오래 곁에 두고 쓰임이 많았던 터라 가장자리엔 작게 이가 빠져 있고 바닥엔 숟가락에 긁힌 미세한 상처가 나있지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도만큼은 결코 모자람이 없고 손에 맞춘 듯 익숙합니다.


제 몸을 살피고 속이 편안한 음식들로 정성껏 식탁을 채우게 된 것도, 맑았던 제 몸과 마음의 그릇에 예기치 못한 병이 찾아오면서부터였습니다. 미처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다는 아픈 후회. 덜컥 깎여나가 버린 건강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에 무너지며, 남들보다 덜 채워진 것 같은 제 삶에 조바심을 내기도 했습니다. 제 삶이 마치 이가 빠지고 흠집 난 낡은 그릇처럼 온전함을 잃어버린 것만 같아 서글프기도 했어요.


하지만 온기가 담긴 낡은 그릇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토록 아프게 깎여나가고 움푹 패지 않았다면, 일상의 아주 작은 다정함이나 위로를 이토록 깊이 담아낼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요. 상처라 믿었던 그 패인 자리는 결핍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눈부신 내일과 새로운 기대를 넉넉히 담아낼 수 있는 '여백'이자 '가능성의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상처를 꿰매어 안고


우리는 흔히 그릇이 두 동강 나거나 깊은 흠집이 나면 쓸모를 다했다고 여겨 미련 없이 버리곤 하지만, 옛사람들은 깨어진 사발을 잇고 고쳐 쓰는 일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갈라진 틈 양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꺾쇠로 단단히 꿰매고, 짙은 색의 옻을 발라 틈새를 묵묵히 메우는 '거머집기'와 '옻칠 수리'가 그것이지요. 이 방식은 상처를 애써 숨기려 하거나 다른 것으로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마치 깊은 상처를 바늘로 꿰맨 듯 투박하고 뭉툭한 자국을 있는 그대로 덤덤히 남겨둘 뿐입니다. 그것은 "아프게 깨어진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꿰매어 안는다"는 수용의 태도입니다.



내가 겪어낸 병의 시간과 뼈아픈 후회들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덮어두고 지워야 할 치명적인 결함이 아니라, 그 아픔의 틈새를 외면하지 않고 다정하게 꿰매어 안을 때, 상처는 제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아름답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보듬어 내었을 때, 상처는 더 이상 부끄러운 흉터가 아니라 다정하고 애틋한 저만의 무늬가 됩니다. 상처의 결을 따라 제 삶의 아름다운 무늬가 귀하게 완성되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모양으로 아름다운 마음들



찬장을 열어보면 참 다양한 모양의 그릇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깊고 둥근 볼, 널찍하고 납작한 접시, 투박하게 빚어진 비대칭 굽 접시까지 어느 것 하나 똑같이 생긴 것이 없지만 각자의 쓰임새와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요.


나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하고 눈부신 모습을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모양의 그릇들이 한데 모여 비로소 하나의 근사하고 풍성한 식탁을 완성하듯, 나와 타인의 다름을 마음으로부터 너그럽게 품어줄 때 우리의 삶도 한층 더 다채로워질 것입니다.


흠집 난 그릇이 건네는 다정한 위로



부엌 창문으로 스며드는 옅은 햇살 아래, 맑게 헹궈낸 낡은 그릇 하나를 가만히 엎어둡니다. 씻겨나간 상처의 자리마다 옅은 빛이 스미고, 오목하게 패인 바닥엔 어느새 다정한 내일이 고일 준비를 마쳤습니다. 부서지고 깨어졌던 시간마저 아름다운 무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으며, 병이라는 짙은 상실감과 함께 끝없이 채우는 일에 지친 당신에게 이 작고 흠집 난 그릇을 조용히 건네봅니다.


부디 깎여나간 당신의 빈자리를 너무 오래 아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오목한 마음은 텅 비어 버려진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다가올 가장 따뜻한 온기를 넉넉히 품어내기 위한 눈부신 여백일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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