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천재의 톱니바퀴

100개의 여의주2

by슈팅스타

2019년, 교육청과 N이버 커넥트재단이 공동 주관하는 '고교 SW 거점학교 창의융합 해커톤'


입시를 앞둔 광역시의 내로라하는 공대 지망생들이 스펙을 쌓기 위해 모여든 그곳에서, 고등학교 2학년 공유주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누나, 진짜 이것 좀 봐주면 안 돼요? 우리 조 아이디어인데……."


민성이가 다급하게 노트북 화면을 유주 쪽으로 돌렸다.

화면 가득 복잡한 C언어 코드와 엉성한 PPT 기획서가 나열되어 있었다. 민성이는 초조한 듯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유주를 올려다 보았다.


"이 정도면 이번 SW 경진대회에서 본선 진출할 수 있을까요? 누나가 보기엔 어때요? 어떻게 해야 심사위원들 눈에 띌지 도무지 감이 안 와서요."


유주는 민성이가 내민 기획서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화면 가장 상단에 적힌 흔해 빠진 주제


[아파트 스마트 홈 IoT 제어 시스템]를 보며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민성아."


유주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민성이가 침을 꿀컥 삼켰다.


"이 대회 심사위원들, N이버 개발자랑 U니스트 교수님들이야. 고등학생들이 주말 몇 번 모여서 만든 스마트홈 앱이 대단해 보일까? 이미 시장에 널리고 널린 기술이잖아. 이건 본선은커녕 서류 광탈이야."


"그, 그럼 어떡해요? 우리 스펙 다 날아가는데……."


"판을 새로 짜야지."


고등부 SW 해커톤 대회가 시작되기 전, 대회장은 각지에서 모여든 영재들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유주는 노트북을 툭 닫으며 거점학교 강의실 안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었다.


이곳에 모인 수백 명의 학생들 중, 자신이 설계한 완벽한 가속기 판을 완성해 줄 진짜 사냥감을 찾는 시선이었다.




그러다 유주의 레이더에 걸린 과학고에 재학 중인, 정형화된 논리 구조를 비웃는 무서운 천재.


도한결 이 눈에 띄었다


유주는 복도 의자에 홀로 앉아 모니터만 응시한 채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고 있던


한결이에게 무심한 듯 다가갔다.


한결이 자리를 비워 화장실로 향하자 유주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화장실 앞 통로,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한결과 유주의 어깨가 아주 가볍게 부딪혔다.


툭.


충격에 한결이의 귀에 꽂혀 있던 무선 이어폰 한쪽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아, 미안해."


유주는 상냥한 얼굴로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한결이의 이어폰을 주웠다.


그리고 한결이 미처 시선을 주기도 전, 손바닥 안에서 미리 쥐고 있던 동일한 모델의 이어폰 한쪽과 한결이의 이어폰과 감쪽같이 바꿔치기했다.


유주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자 복도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던 한결이를 향해,


손에 든 이어폰을 내밀어 보이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여기, 이어폰"


한결이는 유주가 건네는 이어폰을 받아 들었다.


외형도, 색상도 완벽하게 같았고 정상 작동하고 있었지만, 한결은 그것이 제 진짜 한쪽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케이스에 넣었을 때 미세하게 다르게 반응하는 페어링 신호, 그리고 그 이어폰을 타고 흐르는 유주라는 여자의 묘한 아우라.


유주는 한결이의 눈동자가 깊어지는 것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제안했다.


"우리, 이번 해커톤, 나랑 같은 조로 나갈래? 너랑 하면 재밌을 거 같은데."


치밀하게 조작된 궤도 안으로 천재를 끌어들이려던 유주의 첫 번째 설계였다.




같은 조가 된 두 사람은 강의실 구석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유주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고급스러운 가죽 다이어리를 꺼내 펼쳤다.


첫 장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전동 스쿠터 기업, '가온 테크'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유주의 하얀 손가락이 다이어리 속 도면 하나를 짚었다.


"요즘 전동 킥보드나 스쿠터 급발진 사고 뉴스에 많이 나오지? 하드웨어 불량도 있지만, 핵심은 가속기 센서 데이터 제어가 불안정해서 그래. 우리 아버지 회사에서 만드는 전동 스쿠터 가속기 '홀 센서(Hall Sensor)' 알고리즘을 주제로 잡을 거야."


한결이의 눈이 커졌다.


실제 기업에서 쓰는 하드웨어 부품을 고등학생 대회의 주제로 가져온다는 것 자체가 차원이 다른 접근이었다.


"가속기 부품은 내가 실물로 조달해 올게. 가속기에 가해지는 압력 데이터를 AI로 분석해서, 급발진을 원천 차단하는 스마트 가속 제어 코드를 짜는 거야. '친환경 퍼스널 모빌리티의 안전 제어 시스템'. 주제가 이 정도는 돼야 본선뿐만 아니라 대상까지 노려 볼 수 있어."


한결이는 체육복 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숫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아주 귀여운 표정으로 바뀌면서 말했다


" 누나, 대박인데요. 그럼 바로 코딩 시작해요! 누나가 기획 다 끝냈으니까 짜기만 하면 되겠다!"


한결이가 자판에 손을 올리자, 유주는 차가운 아우라를 풍기며 한결이의 손을 툭치며 제지했다.


"이건 단순한 앱 코딩이 아니라 임베디드 모터 제어 물리 공식이 들어가야 해. 우리 수준에선 에러 잡다가 밤새. 하드웨어랑 딥러닝을 동시에 이해하고 미친 속도로 하드코딩을 해줄 진짜 '브레인'이 필요해."


"무슨 소리예요 누나. 제가 해볼게요"


삐딱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꼴이 영락없는 공대 지망생이었지만, 녀석이 짜 내려가는 코드의 속도는 괴물 같았다. 유주가 설계한 가온 테크의 가속기 데이터 도면을 보자마자, 한결이는 단 10분 만에 메인 알고리즘의 뼈대를 구현해 냈다.


강의실 안은 전국에서 모인 고등학생들의 초조한 타자 소리와 한숨으로 가득 찼다. 다들 붉어진 눈으로 모니터를 째려보고 있을 때, 유주는 턱을 괸 채 한결이의 노트북 모니터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 비밀 하나 말해 줄까?"


"네? 뭔데요, 누나?"


한결이가 코드를 치던 손을 멈추고 유주를 돌아보았다. 유주가 주위 눈치를 살피며 한결이의 귓가로 얼굴을 바짝 밀착했다. 은은한 샴푸 향이 훅 끼치자 한결이의 귀 끝이 화끈 달아올랐다.


"우리 팀은 이미 우승이야."


"에이, 누나. 밤을 꼴딱 새워도 마감 시간 맞추기 힘들 것 같은데요, 지금 에러가……."


"쉿."


유주가 하얀 검지손가락을 한결이의 입술 앞에 가져다 대며 말을 자르고는, 소리를 낮춰 큭큭 웃었다.


"다른 팀들이 들을라. 오늘 여기선 대충 돌아가는 척 시뮬레이션만 걸어 놔. 그리고 쟤들이 미련하게 밤샐 동안, 우린 새벽에 바이크나 타러 가자. 너 바이크 탈 줄 알아?"


"바이크요? 네, 뭐…… 125cc 이하는 타죠. 센터에서 혼다 CBR125 R 중고로 사서 연습했거든요."


한결이가 나름 아는 게 나왔다는 듯 웅얼거리자, 유주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결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크하, 너 되게 귀엽다."


"아, 왜 그래요, 누나……."


"그래, 누나는 닌자(Kawasaki Ninja) 있거든? 그거 타고 오늘 새벽에 뚫린 도로 라이딩하는 거야. 알았지?"


한결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고등학생이 가와사키 닌자라니. 한결이는 침을 꿀컥 삼키며 노트북 화면의 공모전 접수 페이지를 가리켰다.


"아니, 근데 누나. 우리 팀이 어떻게 1등을 해요?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이렇게 시간 낭비하면서 라이딩이나 가면 우승은커녕 본선 진출도 못 할 것 같은데……."


"또, 또 , 넌 진짜 월요일 같은 애구나?"


유주가 한결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입상이야. 심사위원들 성향 뻔해. 그럼 너무 튀면 눈총 받으니까 딱 보기 좋게 예선 통과만 하자 그리고. 본선 진출하고 그다음에 최종에서 1등 먹으면 돼. 그동안 너는 저기 컴퓨터 앞에서 딱 자리 지키고 서 있어. 화장실도 가지 말고 열심히 코딩하는 척해라."


"……누나는요?"


한결이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유주는 노트북을 품에 안으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야, 보는 눈도 있는데 나도 여기서 얌전히 있어 줄게. 자, 얼른 작업하자? 그리고 밤 12시 정각에, 저 바보들이 잠이랑 한창 씨름할 때 눈치 못 채게 탈출해서 라이딩 나가는 거다."


유주의 말을 무시하는 듯 한결이의 손가락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 12시, 사방이 조용해진 해커톤 강의실에서 두 천재의 완벽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