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우리의 첫사랑 2
겨우 눈을 붙인 새벽 한 시. 윙윙 울리는 진동 소리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모르는 번호였다.
"... 네 강우진입니다."
잠에서 덜 깬 목소리라 쉰 소리가 나왔다. 나는 목을 가다듬기 위해 두어 차례 헛기침을 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형사님. 너무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저 공현우라고 합니다."
나는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멍한 머리를 굴렸다. 공현우. 공현우가 누구더라...
"아...! 네! 안녕하세요."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을 공현우라고 소개하는 이 사람은 내가 한때 족제비같이 생겼다며 트집을 잡고 질투하기도 했던 트렉스의 드러머 공현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제가 오늘 매니저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좀 전해 들었는데... 좀 자세하게 듣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제가 시간이 지금밖에 안 돼서 너무 늦게 전화를 드렸네요. 주무시고 계셨죠."
나는 생각보다 너무 예의 바른 그의 말투에 약간 놀라기도 했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다 일어난 게 티가 날까 싶어 다시 한 번 작게 헛기침을 했다.
"혹시 형사님이 괜찮으시면, 만나 뵙고 말씀을 좀 나누고 싶은데... 시간이 언제쯤 괜찮으실까요?"
"저보다 공현우 씨 스케줄이 더 바쁘실 거 같은데..."
"아... 그런가요."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1시... 내일 오전 근무라 일찍 준비해야 하긴 했지만 잠깐은 괜찮을 듯했다.
"지금 시간이 괜찮으신 거면 잠깐 뵐까요?"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아 괜찮나요? 너무 늦은 시간이라 괜찮으실지 모르겠어서..."
"괜찮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편하신 곳 주소 보내주시면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아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장소는 메시지 남기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잠에서 깨기 위해 세수를 한 번 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사실 그를 만나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나 때문에 팀이 깨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아 더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만나는 게 약간 어색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민망함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만큼 그녀의 안위가 훨씬 중요했다.
나는 그가 찍어준 주소로 향했다. 도착한 그곳은 아마도 그의 작업실인 듯 보였다. 그는 내게 차를 한 잔 내어주었다. 나는 응접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그가 내어준 차를 받았다.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 시간에 어디 가기가 좀 그래서..."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 진영이가 잡았던 그때 그 범인이 벌써 출소를 한 겁니까?"
"... 네. 맞습니다. 원래 아직 멀었는데, 모범수로 가석방이 된 듯합니다."
"혹시 그 사람이 진영이를 해코지하려고 할까요? 그게 염려되어서 전화 주신 거죠?"
나는 이 사람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알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진영이는 아직 김기태의 정체를 모른다. 그래서 진영이는 김기태를 조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라도 알고 있어야 그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진영이가 범인을 잡을 당시 바로 옆에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더더욱 자세하게 그에 대해 알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김기태에 대해 설명했다. 김기태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그리고 진영이와는 어떻게 얽혀 있는지, 나에게 전화를 걸어 했던 말들까지 모두 말이다.
내 말을 모두 들은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진영이는 범인이 동창 중 한 명이라는 걸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리고 아직 김기태가 정진영 씨를 진짜 노리는지 아닌지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서... 저는 정진영 씨가 아직은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내 말에 동의하는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존재가 처음으로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와 이야기를 마친 후 그의 작업실을 나서기 전,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공적인 이야기는 모두 마쳤지만, 사적으로 사과는 한 번 하고 싶어서였다.
"본의 아니게 제가 팀에... 피해를 끼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말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알아들었다는 듯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괜찮습니다. 낮에 저희 쪽 사람이 좀 무례했죠. 아무래도 제일 고생해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그는 들은 바가 있는지 오히려 내게 양해를 구했다.
"아닙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나는 말끝을 흐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그런 나를 가만히 보았다.
"처음에 느닷없이 팀을 관두고 싶다고 했을 때는 적잖이 당황하긴 했는데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리고 덕분이랄까... 11월부터 진영이는 당분간 휴식기를 갖기로 했어요."
그는 내가 묻지도 않은 그녀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됐어요. 그전부터 무리한 스케줄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긴 했거든요. 작년 가을에는 드라마 촬영하다 쓰러져서 수액 맞고 다시 투입되는 것도 여러 번이었고..."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쓰러졌었다는 말 같은 건 들은 적도 없었다.
"아무래도 진영이가 팀 내 홍일점인 데다가 또 인지도도 높다 보니 회사에서 너무 부려먹죠. 꼭 형사님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쳤을 거예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 매니저야 무조건 강 형사님 탓을 했겠지만, 제가 봤을 땐 회사가 더 나빠요. 저랑 다른 멤버들도 그걸로 회사랑 반년 넘게 싸웠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낮게 웃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틈틈이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지금 그의 행동은 마치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나를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다행히 테오가 나서줘서... 한 시즌 정도는 쉴 수 있게 되었어요. 저나 미르는 진영이나 테오만큼 유명하지가 않아서 도움이 안 되지만, 테오는 메인보컬이라 인기가 좀 있거든요. 테오가 개인 활동으로 앨범을 내겠다고 결정해준 덕에 진영이는 당분간 작품도, 밴드 활동도 없이 푹 쉬게 될 거예요."
나는 그전에 진영이에게 들은 적이 있던 말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테오의 솔로 앨범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밴드로 움직이는 그들에게 보컬의 솔로 앨범은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테오가 계속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테오가 개인 활동을 하면, 공현과 미르는 자동으로 일이 줄어드는 셈이다. 나는 그들이 그녀를 위해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감사합니다."
나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작게 웅얼거렸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나 또 새로운 정보 같은 게 생기면 공유해 주세요."
그는 나를 배웅하며 이야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진영이를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다. 지금은 내가 그런 부탁을 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공현의 작업실에서 나와 차를 향해 걷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겹게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타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금 이 기분이 뭔지를 모르겠어서 한참을 고민했다. 원인을 알 수 없이 가슴이 답답했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차에서 내렸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나는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두 모금 정도 내뱉은 후에야 내 감정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건 내가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에서 비롯된 서러움이었다.
헤어진 지 열 달가량 지난 이 시점에서야 나는 비로소 우리가 진짜 끝이 났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를 가장 걱정하는 사람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뛰어갈 수 있는 사람도 내가 아니었다.
이제 진짜 다시는 그녀를 볼 일이 없을 거란 생각에 나는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결국 두 번째 오열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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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나는 이제 막 헤어졌을 때보다 상태가 더 나빴다. 온라인 게임과 집 외에는 어디도 가지 않았다. 팀 동료나 업무 때문에 만나야 하는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많지 않던 말수도 급격히 줄었다. 농담하기를 좋아하는 팀장님마저 나를 놀리지 않았다. 억지로 웃어야 하는 상황도, 힘들게 괜찮은 척해야 하는 시간도 버거웠다. 민유정이나 홍정의가 가끔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특히 민유정은 집 앞에도 여러 번 왔었다. 내가 계속 만나주지 않자 그녀도 포기한 듯, 이제는 그냥 먹을 거나 생필품 등을 문 앞에 두고 갔다.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받지 않고 문 앞에 방치하곤 했다. 그녀의 성격상 경찰서로 들이닥칠 수도 있을 거라 각오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거기까지 하지는 않았다.
내 상태와 상관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한 달쯤 지난 뒤 내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네. 강우진입니다."
"... 아, 윤재... 맞지?"
나는 귀에 가져다 대었던 전화기를 다시 내려 발신인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가 맞았다.
"누구시죠?"
"나 조영우인데... 혹시 잠시 통화 괜찮아?"
나는 예상하지 못한 발신자의 정체에 아주 잠깐 당황했다.
"어? 아... 어, 그럼. 무슨 일이야?"
"혹시, 김기태 나온 거 알아?"
"김기태?"
나는 잠시 움찔했다. 갑자기 이렇게 그 이름을 들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오늘 김기태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조영우는 머뭇거리며 말을 삼켰다.
"...하, 이게 내가 너한테 전화까지 할 일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가 계속 뜸을 들이자, 나쁜 예감이 나를 덮쳤다.
"... 설마 김기태 그 새끼가 진영이 얘기해?"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자 조영우는 당황했다.
"어? 아니, 아... 그러니까, 그게 맞긴 한데..."
"뭔데."
나는 김기태가 조영우에게 전화를 걸어 진영이 얘기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근데 진짜 별건 아니었어. 정진영 요즘도 인기가 많냐 뭐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뭐?"
"요즘 방송에서 잘 안 보이는 것 같던데 뭐 하는 줄 아느냐는 식이었는데... 정확하게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 나도 그냥 잘 모른다고 했고... 아 근데 이게 좀..."
나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조영우가 말을 끝내기를 기다리며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김기태가 자기를 넘어뜨린 게 진영이인 걸 아는 게 아닌가 해서..."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영우가 느낄 정도면 김기태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을 확률은 더 높아진 셈이다.
사실 진영이가 자신을 잡는 데 한몫했다는 사실쯤이야 기사 몇 줄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처음 잡혔을 때도 관심 없던 그 '시민'의 정체를 왜 이제 와서 들춰보게 되었는지였다.
그냥 재수 없게 "누군가"에게 발이 걸려 넘어졌다고 생각했을 때와,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았을 때, 특히나 그게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분노는 결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는 내가 제일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어 갈까 봐 겁이 났다.
"... 전화 온 게 언젠데? 니 번호는 어떻게 알고? 왜 진영이 소식을 너한테 물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안 건지 왜 나한테 묻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전화는 한 시간 전쯤에... 아 그리고 공중전화인 것 같았어."
"공중전화?"
"어. 번호도 그렇고. 뭔가 동전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렸거든."
가뜩이나 불안했던 마음은 점점 더 날이 서고 있었다. 그냥 단순히 옛 친구에게 전화를 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위가 아픈 기분이었다.
"아무튼 알겠어. 전화 줘서 고맙다. 혹시 또 이상한 일 있으면 그게 뭐든, 지금처럼 전화 줘. 아주 사소한 것도 괜찮아."
"... 너는 정진영이랑 연락해?"
날 떠보는 듯한 그의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아니라고 바로 대답하지 않은 건 조영우도 아직 믿기 어려워서였다. 김기태와 한통속이 아니라는 걸 지금 전화 한 통만으로 믿어줄 순 없었다.
"그건 왜?"
"아... 걔도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진영이가 김기태에 대해 알게 되는 일이 멀지 않았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이제는 내가 아무리 틀어막아도 어디선가 새어 나올 수밖에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두 손이 안 되면 온몸을 써서라도 막아볼 생각이었다.
"진영이 걱정은 안 해도 돼. 주변에 사람들도 있고."
나는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흘렸다.
그렇게 조영우와 전화를 마쳤지만 찝찝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김기태는 왜 조영우에게 진영이의 안부를 물었을까. 단순히 동창 중에 있는 "연예인"의 근황이 궁금했던 거라면, SNS나 기사를 찾아보면 될 일이었다. 활동 여부 정도는 조영우보다 오히려 인터넷이 더 자세히 알려줄 테니까.
그런데 굳이 공중전화까지 써가며 그녀의 안부를 묻는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요즘 누가 공중전화를 사용한단 말인가. 나는 김기태가 내게 전화했을 때 발신번호를 체크하지 않았던 것이 약간 후회되었다.
김기태는 혹시 진영이가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얼마나 사람들 눈에 노출이 되어 있는지를 떠보려는 게 아닐까? 지금도 어디선가 진영이 뒤를 밟으려고 각을 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 진영이가 작품이나 밴드 활동도 없이 휴식기인 것이 어쩌면 김기태에게 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조영우에게 받아둔 공중전화의 번호로 위치를 파악하고 그 주변 일대의 CCTV를 뒤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공중전화 박스가 있던 곳은 오래된 상가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고, 공중전화를 정확하게 비추는 CCTV도 없었다. 나는 주변 가게를 하나씩 돌아다니며 협조를 구하고 영상을 확인했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김기태의 작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정식 사건으로 접수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적었다. 심지어 김기태가 진영이의 안부를 물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가 범죄를 계획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나 역시도 내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결국 공중전화 주변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의 블랙박스에서 김기태의 모습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가 향한 방향을 따라 근처 CCTV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동선이 끊기기도 했고, 며칠을 매달려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협조를 구할 수 없는 곳에서는 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어 몇 번이나 허탕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아무 소득이 없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조금씩 김기태의 활동 반경이 좁혀져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영이의 동선과 겹치는 곳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내 불안이 그저 기우이기를 바라던 내게는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김기태가 진영이와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내 불안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나는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더 파고들었다. 이게 형사의 촉이든 그저 미련 넘치는 전 남자 친구의 기우이든 내 체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변명할 생각도 없다. 나는 지금 김기태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가끔은 지칠 때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내 행동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김기태가 진영이의 이야기를 한 것도 정말 별 뜻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내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그녀를 해칠 거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김기태를 거의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제 진영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고, 그녀는 내가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있지도 않은 위험을 만들어내며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발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그냥 내가 미련이 남아서 전 여자 친구에게 집착하는 미친놈이라서 이러는 거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아니길 바라던 내 불안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김기태가 기어이 진영이의 사무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연히 동선이 겹친 것인가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연습실 근처를 배회하는 김기태의 모습을 발견하자 더 이상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워졌다.
나는 김기태가 나타난 시간과 장소를 전부 따로 적어두기 시작했다. 퇴근하면 그 주변을 돌았고, 쉬는 날이면 몇 시간씩 차 안에 앉아 주변을 살피기도 했다.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하루는 김기태로 보이는 사람을 쫓아갔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적도 있었다.
가끔은 이러다 진영이라도 마주치면 오히려 내가 스토커로 몰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사실 마냥 웃을 일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끝에는 늘, 그녀 옆의 새로운 남자를 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따라붙었다.
이미 우리는 헤어진 지 제법 오래되었고, 그녀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겨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굳이 그걸 내 눈으로 보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기태의 행적을 쫓던 중 그의 동선이 점점 진영이의 집에 가까워지는 걸 느낀 나는 진영이 자택 근처의 CCTV를 확인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집 근처 CCTV에서 김기태를 발견하고 말았다. 나는 믿을 수 없어 화면을 뒤로 돌렸다가 다시 재생했지만 틀림없이 그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가 아닌 '공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