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 24. 피렌체의 첫째날 ②
시뇨리아 광장에서 잠시 두리번거리고 나니, 이내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동행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그랬듯, 네이버의 한 유럽여행 카페를 통해 구한 일일동행. 그런데 세상이 참 좁습니다. 로마 셋째날에 만났던 바로 그 분과, 오늘 피렌체 첫째날에 함께 할 이 분이, 제가 포지타노에 다녀온 어제 함께 움직였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생각해보면 같은 시기에 홀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그 카페에서 동행을 구할 한국인이 몇이나 되겠냐만은, 그럼에도 이렇게 인연이 겹치는 건 신기한 일입니다. 한데, 이 분이 그새 우연히 새로운 동행 하나를 더 구했다고 하더군요. 혹시 같이 다녀도 되겠냐고 하시는데, 저야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 셋이서 함께 돌아다니기로 했습니다. 참고로 이 분은 조금 이따 잠시 헤어져 쉬는 동안에, 다른 동행들을 또 데려오더랍니다. 무척 외향적인 분이군요. 이때까지, 저도 어디 가서 외향성으로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저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일단 저희 세 사람의 목적지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과 그 옆 조토의 종탑입니다. 그러나, 500m도 안되는 그 대로를 걸으며, 사방에 널린 간식거리의 유혹에 수없이 흔들립니다. 결국 500m는 커녕 시뇨리아 광장을 벗어나기도 전에 어느 젤라또 가게에 들어갑니다. 사진을 보니, 아마도 딸기와 망고 그리고 멜론을 고른 것 같습니다. 바티칸을 나오면서 젤라또에 대한 저의 지론을 열심히 펼쳤었지요. 젤라또의 진득한 텍스처에는 상큼한 과일 계열이나 마냥 무거운 초콜릿 계열보다는, 보다 다층적인 리조(쌀)와 피스타치오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말입니다. 다만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워낙 날이 무더웠다보니 목이 타서, 조금 더 상큼한 과일 계열을 셋 골랐던 것 같은데요. 여기서 또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그 주연은 바로, 멜론. 보시면 살짝 붉은 기운까지 도는 서늘한 느낌의 아이보리 색으로, 한국에서 우리가 먹는 그 쨍한 연두색과는 전혀 다른 빛깔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맛 역시 그렇습니다. 맛과 향 자체는 언뜻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강력하게 찔러오기보다는 혀 위에 구르듯이 내려앉는 느낌이랄까요? 분명 당도 자체가 밀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멜론을 직접 씹을 때 새어나오는 그 약간 맹맹해보이는 맛까지 섞여서 밀려오다 보니, 리조나 피스타치오가 그렇듯 그 맛이 상당히 다층적입니다. 이 멜론은, 분명 과일이 맞지만, 아무래도 소르베나 그라니따보다는 젤라또에 어울리더군요. 서걱서걱함이 이미 맛 자체에 깃들어 있기에, 보다 진득한 텍스처가 필요하다는 느낌.
어쩌다보니 장광설을 펼쳤네요.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묘사를 해봐도 그 맛과 향을 제 혀에 다시 불러올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 참 슬픕니다.
이제 드디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를 제대로 대면할 시간이 왔습니다. 아까 오면서 잠시 스치기는 했습니다만, 그때 이미 "이곳이 왜 피렌체의 상징인지 알겠다"며 경탄하기는 했습니다만, 이렇게 가만히 서서 이곳을 바라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분명 다른 감각을 주지요. 그러나, 사실 아직은 온전히 감탄할 시간이 아닌가 봅니다. 열사병에 걸린 것 같다고 호소할만큼 강렬했던 무더위 탓입니다. 실제로 다시 찾아보니 이 날 피렌체에는 적색 폭염 경보가 내려졌고, 최고 37도까지 기온이 올라갔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로 심각했던 무더위가, 가만히 서서 인류의 역작을 응시할 기회를 제게서 앗아간 첫번째 범인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범인이 있었는데요. 바로 시간의 압박이었습니다. 저와 동행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두오모와 조토의 종탑에도 오를 수 있는 브루넬레스키 패스라는 것을 예매해놓은 상태였는데요. 이 중 두오모 입장 시간이 조금 엄격했어요. 15시에 입장 시작 & 15시 45분에 퇴장. 두오모에 오르고 내리는 일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기에, 따라서 45분은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15시에 맞춰서 입장을 하기로 동행과 함께 결정했습니다. 이에 더해, 15시 입장을 위한 대기줄까지 따로 늘어서 있는 상황이었다 보니,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를 차분히 지켜보는 대신, 곧바로 그 대기줄에 합류해야만 했던 것이죠.
참고로 동행이 데려온 또 다른 동행은, 예매를 안 한 탓에 이 시간에 혼자 조토의 종탑에 올랐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같이 안내 직원에게 현장 구매는 어렵겠냐고 물어보기까지 해봤지만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저희가 조토의 종탑에 오르는 동안에는 어디 계셨는지 모르겠네요. 이럴거면 동행을 왜한거냐 싶으실텐데... 사실 저도 궁금합니다. 하하.
그래서 우스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내부를 제대로 둘러보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두오모에 올라가기 위해 성당 안을 지날 때에는 두오모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차서 미처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고, 두오모에서 내려오며 성당 안을 지날 때에는 너무 지치고 더워서 탈출하듯 뛰쳐나오는 통에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그저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각각 남긴 사진 한 장이 전부군요.
그래도 브루넬레스키 패스는 11일부터 13일 사이에 '두오모 위'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 그러니까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와 조토의 종탑, 그리고 오페라 박물관 등에 한번씩 입장할 수 있도록 열어놓고 있습니다. 너그러운 처사입니다. 제가 방금 지나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는 두오모 입장을 위해 들른 것에 불과하니만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그 자체에 대한 입장권은 아직 남아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과연, 저는 피렌체에서의 남은 시간 중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에 한 번 더 들어서게 될까요?
오르는 길의 사진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두오모를 오르는 길이 많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바티칸의 쿠폴라를 오를 때보다도 더. 아무래도 바티칸에서는, 돔의 휘어진 계단을 오르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지붕 즈음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움직였으니까요. 그러나 이번에는 거의 30층 높이를 전부 걸어 올라야 했습니다. 비좁고 가파른데 천장은 낮은 계단을 통해서. 그때까지만 해도 운동과는 일절 관계가 없던 스물셋의 제가, 그 무더운 날에 그걸 다 오르고도 멀쩡한게 오히려 이상한거죠. 그 와중에 저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동행의 페이스를 맞춰야 했다는 겁니다... 물론 제가 조금만 천천히 갈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면 난색을 표했을리가 만무한 호인이셨지만, 어디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요. 뭐... 따지고보면 결국 제 무모함이 저를 잡아먹은 셈이군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 고행의 끝에, 분명 보답은 있었습니다. 드디어 붉은 빛의 도시를 제 눈으로 목격한 것입니다. 턱턱 막히는 무거운 공기에서 벗어나 이제 막 숨을 몰아 쉬려는데, 이번에는 눈앞을 가득 채운 붉은 빛이 다른 의미로 숨이 턱 막히게 만듭니다. 분명 눈앞을 채운 광경에는 파아란 하늘도 있고, 초록의 산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건물들도 하나하나 세밀히 살펴보면 결코 붉은 빛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저 광경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사진으로 저 광경을 엿보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이 광경을 붉은 빛의 광경으로 기억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붉은 빛이라는 이름 아래, 보이는 건물 하나하나의 독자성은 물론이고 그 형태를 만드는 선과 형까지도 흐려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붉은 빛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그 세부의 소실까지도 기꺼이 수용하고 싶어질 만큼.
그러나 거기에 도취되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총체의 아름다움이 아닌 구체의 처절함을 보아야 인간의 삶이 이어질테고, 다시, 고행의 계단을 내려가야 새로운 여행이 이어질테죠. 마침 허락된 시간이 고작 10여분 남아있기도 하고, 저 체력 좋은 동행도 슬슬 내려갈 준비를 하는군요. 세이렌의 목소리에 매혹되어버렸으되 동료들에 붙잡혀 그들의 목소리를 놓쳐버린 오디세우스의 심정으로, 저도 내려갈 준비를 합니다.
그래도 잠시나마 아름다움에 취해있던 보람이 있나 봅니다. 잠시 멈춰, 창살을 통해서나마 보이는 바깥 풍경을 사진으로 담은 걸 보니까요. 그저 꼭대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닿아 이 고행을 끝내고 싶다는 절박함 대신, 잠시의 멈춤을 가져갈 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