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통합의 상징, 비빔밥

“김밥? 비빔밥?”


아내가 주말 아침 메뉴를 정하란다. 내겐 둘 다 번거롭고 어려운 요리 같은데 아낸 라면 끓이듯 쉽게 말한다. 하지만 두 메뉴에는 아내의 의도가 숨어 있다. 냉장고의 오래된 식자재를 한번에 치울 수도 있고 채소를 잘 먹지 않는 나와 딸아이에게 메뉴 선택권까지 주며 군소리 없이 다양한 채소를 먹게 하려는 것이다. 딸이 비빔밥을 선택하자마자 아내는 고기를 볶고 시금치와 콩나물을 무친다. 밥 위에 잘 볶아진 고기와 채소를 펼쳐 올려놓고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얹는다. 그 모양이 마치 화려한 꽃다발 같기도 하고 인상파 화가의 그림 같기도 하다. 그 위에 깨를 뿌리고 참기름을 한 번 두르면 맛난 비빔밥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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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꽃이 불이 타오르듯이 피어 매우 화려함’이라는 뜻의 백화요란(白花燎亂)이라는 말이 있다.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하면 이런 말로 표현할까 싶은데 비빔밥에도 이 말이 쓰인다. ‘화반(花飯)’, ‘꽃밥’이라고도 불리는 비빔밥은 그 화려함 때문에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알리는 영상에도 자주 등장한다. 뉴욕 타임스퀘어 광고판에도 비빔밥 광고가 등장하기도 했었다.


비빔밥이 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97년 대한항공에서 기내식으로 제공되면서부터다. 비빔밥은 국제 기내식 협회에서 주관한 기내식 분야 최고상인 ‘머큐리상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이 내한 공연 때 비빔밥을 먹고 극찬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기네스 팰트로는 비빔밥 조리 영상까지 SNS에 올렸고 셜록과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를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도 즐긴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사이먼 페그가 비빔밥을 먹는 사진과 방탄소년단 음악을 SNS에 올려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해외에서 비빔밥 식당이 성업하고 있고 현지화를 통해 다양한 비빔밥이 만들어지고 있다. 고추장 대신 현지의 양념을 사용하기도 하고 고수나 케일 등 한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채소를 넣기도 한다. 쌀도 현지에서 생산되는 품종을 이용한다. 어느덧 비빔밥은 피자나 파스타처럼 세계인의 음식이 됐다.


1800년대 말에 간행된 작가 미상의 조리서 『시의전서』에는 비빔밥 조리 방법과 상차림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비빔밥에 육류와 채소류, 달걀, 다시마 등 각종 재료가 들어갔음을 알 수 있고 고춧가루와 깨소금, 기름 등 양념도 다양하게 쓰였다. 비빔밥 한 그릇으로 당시 우리 선조들이 어떤 음식들을 먹고 살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이어령 선생이 우리 문화를 ‘보따리 문화’라고 말한 것처럼 비빔밥도 ‘맛의 보따리’이지 않나 싶다. 비빔밥은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이 즐겼던 음식이다. 비빔밥이 제사를 지내고 상에 올려졌던 음식들을 후손들과 골고루 나눠 먹었던 ‘제삿밥’으로 시작되었다거나 농경 슬롯에서 ‘들밥’으로 먹었다거나 남은 음식으로 새해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 밥에 반찬을 모두 넣어 비벼 ‘밤참’으로 먹었다는 등의 유래는 우리 조상들이 비빔밥을 먹기 시작한 것이 문헌의 기록 훨씬 이전임을 추측하게 한다. 비빔밥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DNA에 숨어 들어와 있는 것이다.


비빔밥은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음식이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육류나 달걀, 해산물에는 단백질이 풍부하고 각종 채소에는 비타민, 무기질, 식이 섬유소의 함량이 높아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등과 같은 성인병 예방에 좋다. 밥을 비빌 때 넣는 기름류로는 지방을 보충할 수 있고 깨소금은 항산화 작용과 항암 효과가 있다. 비빔밥은 채소와 고기의 비율과 밥의 양만 조절하면 최고의 다이어트 음식이기도 하다. 비빔밥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추장이다. 고추장에는 캡사이신이 들어 있는데 암 예방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이다. 시련 당한 여주인공이 냉장고를 열고 김치와 콩나물무침, 채소 등을 양푼에 마구잡이로 넣고 고추장에 숟가락 부러질 정도로 비벼 우걱우걱 먹으며 화를 삭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상처를 준 이의 얼굴을 생각하며 마구 비비는 행위로 화를 풀고 고추장의 매운맛이 스트레스를 날리게 도와주니 비빔밥은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좋은 것이 그 장면 하나로도 증명된 셈이다.


비빔밥은 보기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 전국에 비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수도 없이 많고 작은 동네 분식점 메뉴판에도 한두 가지 비빔밥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세계화에도 성공했다. 비빔밥의 유명세는 무엇에 기인하는 걸까? 수많은 비빔밥이 있지만, 비빔밥에 빠지지 않는 재료가 있다. 채소와 고추장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기는 권력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평민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채소는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장 없는 집은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빔밥은 고기나 해산물, 달걀 등과 같이 단백질을 제공하는 식자재와 채소의 비율이 2:8 정도 된다. 약간의 단백질 공급원만 있으면 누구든 영양가 있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그러기에 왕부터 귀족, 양반, 평민 등 누구든지 즐길 수 있는 음식이고 제삿날이나 들에서 일할 때, 또 섣달그믐날이든 때를 가리지 않고 먹었던 음식이다. 이렇게 비빔밥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평등 의식을 키워 주고 있었다. 비빔밥은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예나 지금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즐길 수 있는 음식인 것이다. 지리적 측면이나 재료 면에서, 또 조리법이나 먹는 방법에서도 비빔밥은 평등하다. 지역의 특수성이 그대로 반영됐고 귀하고 천한 것 구분 없이 모든 재료가 비빔밥으로 하나가 된다. 먹을 때는 고추장을 넣고 죄다 비비면 끝이다. 그 비빔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한 그릇 안에서 비벼지는 음식들은 자신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도 먹는 이에게는 새로운 맛을 선사한다. 고기는 고기대로 채소는 채소대로 맛과 향을 유지한다. 뭉개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릇 안에서 통합이 이뤄지는 것이다. 통합은 단순히 합쳐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적게는 대여섯에서, 많게는 서른 가지 넘는 재료들이 한 그릇에 담겨 또 다른 맛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통합은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는 개념이다. 우리 민족은 이런 통합의 정신을 여러 역사적 사실로 증명해 오고 있다. 자음과 모음을 합해 글을 만든 한글이 그렇고 거북이 모습에서 착안해 만든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 전선인 거북선 역시 통합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정보통신 산업의 발전과 최근 음악이나 드라마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한류의 인기도 이에 기인하지 않나 싶다. 그만큼 우리는 평등과 통합이라는 개념에 친숙하다. 비빔밥 한 그릇만 보더라도 우리 슬롯는 무한한 발전 에너지를 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편견 없는 아이들에게 비빔밥은 통합의 정신을 키우기에 훌륭한 음식이다. 그런 마음에 아이들이 일상에서 자주 비빔밥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풍부한 영향과 통합의 정신을 바탕으로 그 아이들이 k-팝, k-드라마의 새로운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 아닌가! 아울러 나에게도 내가 어디에 있든 그 평등과 통합의 정신이 깃들기를 고대하며 주말 아침 사정없이 비빔밥을 비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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