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러스는 추억이다

고장이 아니라 접지가 살짝 떠 있었네요.

by청산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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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오래 쓰는 것이 미덕이 아닌 세상이다.


휴대전화는 약정이 끝나면 새것으로 바꾸고, 자동차는 신형이 나오면 마음부터 흔들린다. 냉장고는 멀쩡해도 디자인이 낡았다는 이유로 바꾸고, 텔레비전도 고장이 나서가 아니라 화면이 더 커졌다는 이유로 교체한다.


고치는 기술보다 버리는 기술이 더 발달한 시대다.


가끔은 사람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관계도 조금만 삐걱거리면 끊고, 온라인 게임도 힘들면 옮기고, 마음도 지치면 포기한다. 어느새 우리에게는 수리보다 교체가 더 익숙해졌다.


그런 세상을 거슬러 우리 집에는 여전히 함께 살아가는 녀석이 한 대 있다.


2010년, 큰마음 먹고 장만한 오피러스 프리미엄이다.


그날 전시장에 놓인 검은색 오피러스는 단순한 자동차가 아니었다. 오래 품어온 꿈 하나가 눈앞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손끝이 괜히 떨렸고, 며칠 뒤 영업사원에게 스마트키를 건네받던 순간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신호대기에 설 때마다 옆 차 운전자가 내 차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물론 나만의 착각이었겠지만,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새 차에서 풍기던 가죽 냄새마저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한 기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시작한 인연이 어느덧 열여섯 해째다.

주행거리는 16만 킬로미터.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훌쩍 넘긴 셈이다.


그동안 오피러스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의 성장 앨범이었다.

주말이면 뒷자리는 늘 시끌벅적했다. 과자 부스러기는 시트 틈새마다 숨어들었고, 창문에는 아이들의 작은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휴게소에만 들어서면 어김없이 소리가 터졌다.

"아빠, 아이스크림!"

"아빠, 호두과자!"

돌아오는 길이면 아이들은 안전벨트도 풀지 못한 채 곤히 잠들곤 했다.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아이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뒷자리는 조용해졌다. 이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돋보기 하나와 장바구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추억이 남았다.

차도 늙고 사람도 늙었다. 그 세월을 우리는 함께 건너왔다.


한번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계기판에 노란 경고등이 켜졌다.

'설마.'

가속 페달을 밟아도 차는 힘을 쓰지 못했다. 뒤에서는 대형 화물차들이 굉음을 내며 스쳐 지나갔고, 그 바람에 차체마저 흔들렸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겨우 갓길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켰다. 견인차를 기다리는 동안,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자동차 소리마저 그날은 무섭게 들렸다.

진단 결과는 촉매 고장이었다.

수리비는 150만 원.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그 돈이면 차 바꾸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계산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무릎이 아프다고 사람을 버리지는 않지 않는가. 오랫동안 함께한 차를 수리비만 따져 쉽게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수리해서 다시 탔다.


몇 해 뒤에는 서울에 사는 딸을 태우러 가던 길에 사고가 났다.

아내는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뒷자리의 딸은 음악을 듣고 있었다.

"다음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할까?"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쿵!


차 안이 크게 흔들렸다. 안전벨트가 가슴을 세게 조였고, 핸들은 손에서 미끄러질 듯 떨렸다. 뒤차가 들이받은 것이다. 트렁크는 찌그러졌고 범퍼는 바닥에 끌렸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차는 수리를 마친 뒤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최근에는 시동이 말썽이었다.

아침에 시동 버튼을 누르니 '딸깍' 소리만 나고 잠잠해졌다. 배터리를 새것으로 바꿨지만 며칠 뒤에는 신호대기 중 시동이 꺼졌다. 전기 배선도 손보고 여러 부품을 점검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결국 평소 알고 지내던 고참 기술자를 찾아갔다.

그는 보닛을 열고 배터리 단자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렌치로 배터리 단자를 단단히 조였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

"고장이 아니라 접지가 살짝 떠 있었네요."


허탈해서 웃음이 났다.

범인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접지 하나였다.

차를 통째로 바꾸거나 여러 부품을 뜯어고칠 일이 아니었다. 느슨해진 연결 하나만 제대로 잡아주면 될 일이었다.


문득 사람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언가 달라져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큰 변화가 있어야 삶도 나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는 사소한 것 하나가 삶의 시동을 다시 걸어준다.

"고맙다."

"수고했다."

"미안하다."

"괜찮다."


그런 말 한마디가 사람 사이의 연결을 단단하게 해준다. 반대로 그런 말들이 사라지면 관계의 접지도 조금씩 헐거워진다. 작은 틈을 그대로 둔 채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마음의 시동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도 주차를 마치고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려 본다.


열여섯 해를 묵묵히 함께해 준 낡은 동반자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건넨다.


'접지도 단단히 물렸으니, 우리 아직은 더 달릴 만하지?'


보닛 아래 어디선가 녀석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그래.

아직은 갈 길이 남았잖아.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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