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가구는 말을 하지 않는다

by청산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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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면 아내는 거실 소파 왼쪽 끝에 앉고, 나는 오른쪽 끝에 앉는다.

중간에는 리모컨 하나가 경계처럼 놓여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정한 가구처럼 누가 정해 준 것도 아닌데, 늘 그 자리다. 익숙한 듯, 조금은 무심한 듯 앉아 있다.


“뉴스 볼 거야?”

“당신 보고 싶은 거 봐.”


이것이 우리가 저녁마다 나누는 대화의 거의 전부다.

텔레비전을 두 시간쯤 보고 나면 우리는 정말 가구처럼 각자의 자리에 놓인다. 아내는 소파에 남고, 나는 서재 의자로 옮겨 간다. 리모컨은 여전히 그 경계 위에 놓여 있다. 텔레비전 화면의 불빛만이 어두운 거실을 희미하게 비춘다.


젊은 날에는 이 침묵이 못내 서운했다. 말이 줄어든 만큼 마음도 멀어진 줄 알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었다. 대답이 짧으면 괜히 서운했다.


신혼 무렵에 사소한 일 하나에도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날을 세운 적이 있었다.

나의 말에 마음이 상한 아내는 설거지하다 말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좁은 셋방에서 등을 돌리고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간이 참으로 길었다. 나는 바카라을 펼쳐 들었지만 몇 쪽 읽지 못하고 덮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방 안의 정적은 더 짙어졌다. 누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거나 말을 걸면 그만이었다.

좁쌀만 한 그놈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아침이 되자 아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묵묵히 부엌에서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슬그머니 수저를 들어 식탁에 놓고,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 아침상을 거들었다. 잠시 후 아내가 내 앞에 조용히 찌개 그릇을 놓아주었다. 나는 찌개 그릇을 받아 식탁 한가운데로 쓱 옮겨 놓았다. 그리고 컵에 물을 따라 아내 자리에 놓았다. 그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서툰 사과였다. 김이 오르는 찌개 그릇 사이로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도 끝내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우리는 서로 먼저 사과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넘긴 밤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익숙한 침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아내가 텃밭에서 고구마순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저녁을 먹고 나자 아내는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구부정한 어깨에 하루의 피로가 얹혀 있었다.


내가 슬그머니 곁에 앉아 고구마순 하나를 집어 들자 아내가 말했다.


“그거 손에 물들어.”

“이거 끼고 해. 그러면 물 안 들어.”


못 들은 척 껍질을 벗기고 있으니, 잠시 뒤 아내가 비닐장갑을 하나 건넸다.


고구마순 껍질은 생각보다 질겼다.

비닐장갑을 끼고 껍질을 벗기려니 자꾸 손에서 겉돌고 미끄러졌다. 아내는 손끝으로 줄기의 끝을 살짝 꺾어 껍질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 흉내를 내다가 번번이 중간에서 끊어 먹었다. 아내는 말없이 다시 한 줄기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결국 우리는 답답한 비닐장갑을 벗었다. 조금 지나자 내 손톱 밑으로 짙은 보랏빛이 스며들었다. 아내의 손은 이미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바라보다 소리 없이 웃었다.


“당신 손도 많이 물들었네.”

“씻으면 빠지겠지.”


오래 앉아 있다 보니 목이 말랐다.

나는 냉장고에서 오렌지를 꺼냈다. 냉장고에 넣어 둔 것이라 차가웠다. 나는 오렌지 껍질을 까서 아내에게 건넸다. 아내는 말없이 받아 입에 넣었다.


“시원하고, 다네.”


나도 오렌지 한 알을 입에 넣었다.


“그러네.”


거실에는 텔레비전 소리와 고구마순 껍질 벗기는 소리만 낮게 흘렀다. 그날도 우리는 별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침묵은 이상하게 쓸쓸하지 않았다.


고구마순 껍질을 다 벗기고 나니 밤이 꽤 깊어 있었다. 아내는 양푼을 들고 주방으로 갔고, 나는 신문지를 접어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우리는 또 별말 없이 각자의 일을 했다.


손톱 밑에 자줏빛으로 남은 고구마순 물자국을 보며, 문득 일본의 ‘킨츠기’라는 도자기 수선법이 떠올랐다.

깨지거나 금이 간 그릇의 틈을 옻과 금가루로 메워 다시 잇는 방식이다. 수리가 끝난 도자기에는 예전의 매끈함 대신 황금빛 선이 남는다. 사람들은 그 선을 흠집이 아니라 그릇이 지나온 시간의 무늬라고 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 건너온 부부의 삶에도 금이 가기 마련이다. 사소한 서운함이 지나간 자리, 말하지 못한 마음이 깊이 고인 자리, 괜히 등을 돌리고 차갑게 잠든 밤이 남긴 가느다란 생채기들. 하지만 말로 다 채우지 못한 자리를 함께 견딘 시간과 묵은 정이 천천히 메워 간다. 그렇게 오래된 부부는 젊은 날의 매끈함 대신, 함께 살아낸 시간의 무늬를 갖게 된다.


오래 살아 보니, 부부 사이의 침묵에는 온도가 있었다.

침묵은 마음이 식었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무언의 방식이었다. 부부란 서로를 마주 보며 위로하는 사람이기보다, 서로의 시린 밑바닥을 덥혀 주는 온돌에 더 가까웠다. 추운 날이면 문득 생각나는 온기. 그 잔잔한 온기가 우리를 지탱해 주는 힘인지도 모른다.


가구들끼리는 원래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다만 오래된 가구는 말없이 집 온도를 기억한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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