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은 열어 봐야 알고, 얼굴은 살아 봐야 안다

by청산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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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200억 원보다 더 오래 남는 얼굴을 보았다.


얼마 전, 자산이 200억 원에 이른다는 노신사를 만났다.


부자라고 하면 으레 번듯한 양복에 번쩍이는 시계,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떠올린다. 나도 그랬다. 그 정도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투에는 은근한 힘이 들어가고, 걸음걸이에도 남다른 자부심이 묻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분은 달랐다.

키는 작았고 눈가에는 주름이 깊었다. 옷차림도 수수했다. 동네 부동산에서 차를 마시는 어르신 같기도 하고, 시골 장터에서 막 올라온 분 같기도 했다. 솔직히 조금 의아했다.


‘이분이 정말 200억 자산가라고?’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의아함은 금세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그분은 참 잘 웃었다. 어떤 이야기도 모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끝에 힘을 주거나 자기 자랑으로 상대의 말을 끊지도 않았다. 카페 직원에게 건네는 말에도 스스럼이 없었고, 직원 역시 편안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곁에 있으면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었다.


돈이 많아서 저렇게 여유로운 걸까. 아니면 원래 저렇게 넉넉한 사람이어서 돈도 모을 수 있었던 걸까.


문득 예전에 어느 바카라에서 읽었던 ‘부자의 지갑’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지갑은 돈을 담는 물건이지만, 그 안에는 돈을 대하는 사람의 생각과 습관도 담겨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디에 돈을 쓰고 무엇을 아끼는지 살펴보면 그 사람의 생활 방식도 엿볼 수 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끝내 그분의 지갑을 보지 못했다.

대신 자꾸만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표정, 남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어 주는 태도.

지갑에 든 돈이 그 사람의 재산을 말해 줄 수는 있어도, 그 넉넉함까지 설명해 주지는 못하는 듯했다.


얼굴에는 살아온 세월이 남는다. 하지만 인품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말을 얼마나 유창하게 하는가보다 남의 말을 어떻게 듣는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그 사람의 됨됨이가 묻어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돈이 많은 사람보다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한 사람에게 더 끌린다. 작은 일에도 함께 웃어 주고, 남의 수고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자꾸 말을 걸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이 쌓이면 신뢰가 되고, 신뢰는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좋은 사람이라고 누구나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지갑을 채우는 데는 부지런하다. 조금이라도 더 모으려 애쓰고, 잃지 않으려고 마음을 쓴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어떤 얼굴로 남을지는 자주 잊고 산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익숙하다는 이유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삼켜 버리기도 한다. 지갑 속 돈은 아끼면서 사람의 마음은 가볍게 대할 때가 있다.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은 보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남은 내 표정은 거울로 확인할 수 없다. 내가 떠난 뒤 누군가 나를 떠올리며 미소 지을지, 고개를 저을지 알 길이 없다.

내 얼굴은 거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났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날 만난 노신사는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런데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200억이라는 숫자보다 그분의 편안한 얼굴이 더 오래 남았다.


나도 지갑을 채우는 일만큼 얼굴을 가꾸는 일에 마음을 써야겠다. 주름을 감추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삶으로 얼굴을 가꾸는 일이다.


지갑에는 내가 모은 돈이 담기지만, 얼굴에는 내가 살아온 날들이 담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오래 남는 것은 지갑의 두께보다 나와 함께 있을 때 그들이 느꼈던 마음일 것이다.


지갑은 열어 봐야 알고, 얼굴은 살아 봐야 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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