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술장엔 장인어른이 계신다

술병 하나하나가 그 술을 보내준 사람을 묘하게 닮아 있다.

by청산별곡

“선배님, 술 한잔하시죠.”


몇 년 전 이야기다.

후배에게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좋은 술이 있습니다. 나오시죠.”


‘좋은 술’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약속한 음식점에 도착하니 후배는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는 귀하디 귀한 능이버섯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무슨 좋은 술이야? 그리고 능이는?”


후배가 술병 하나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드시려고 담가 놓으신 인삼주예요.”

그러더니 장난스러운 얼굴로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능이랑 몰래 들고 나왔어요.”

우리는 마주 보고 한바탕 웃었다.


후배는 화양동 깊은 계곡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지금도 시골에서는 아버지가 직접 인삼을 재배하신다고 했다.

그러니 그 인삼주는 그냥 술이 아니었다.

산골 아버지의 손길과 시간이 들어간 술이었다.


“능이에는 소고기지.”

우리는 소고기를 모둠으로 주문했다.


소고기 한 점, 능이 한 점,

그리고 인삼주 한 잔.


첫 잔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은은한 인삼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깊은 산속에서 길어 올린 맑은 물을 마시는 듯했다.

잔을 비우고 또 채우다 보니 세상 시름이 사라졌다.

후배와 나는 취흥이 도도해졌다.


"이것이 신선이로다."


그날 먹다 남은 인삼주는 지금도 우리 집 술장 한쪽에 고스란히 놓여 있다.


우리 집에는 흔히 위스키장이라 부르는 술장이 있다.


묵직한 위스키도 있고,

부드러운 와인도 있고,

향이 깊은 코냑도 있다.

누군가의 손맛이 담긴 담금주도 있고,

고향을 품은 토속주도 있다.


그런데 가끔 술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술보다 사람이 먼저 보인다.

누가 보내왔는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디로 여행을 다녀왔는지까지 하나둘 떠오른다.


신기하게도 술병 하나하나가 저마다 그것을 건넨 사람을 묘하게 닮아 있다.

어떤 술은 묵직하고,

어떤 술은 부드럽다.

또 어떤 술은 첫맛부터 유쾌하다.


술병 하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이 따라온다.

그 안에는 우정이 있고,

웃음이 있고,

우리가 함께 건너온 세월이 담겨 있다.


제천에 사는 지인이 보내준 야관문주도 있다.

“몸에 좋은 거니까 저녁에 한잔씩 드세요.”

그 따뜻한 한마디가 고마워서 고이 모셔두었다.

마시기가 아까워 미루고 미루다 보니 그사이 세월이 흘러 어느덧 30년이 흘렀다.

야관문주가 나이 먹어 30년 산이 된 것이다.


해마다 명절이면 잊지 않고 술을 보내오는 제자의 마음도 그곳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술장 안에는 술병만 있는 게 아니다.

술을 건네준 사람의 마음과 그때의 시간까지 살뜰하게 들어 있다.


그중에는 유난히 눈에 밟히는 술이 있다.


안동소주다.


장인어른이 사위와 마주 앉아 한잔하고 싶다며 보내주신 술이다.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손수 안동소주를 꺼내어 사위와 한잔씩 기울이셨다.

미처 다 드시지 못한 몇 병은 그대로 남아 술장 한편을 지키고 있다.


장인어른은 이제 계시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그 병마개를 열지 못한다.


나는 예전만큼 술을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시절의 술자리가 문득문득 그립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웃다가 한잔하고,

한 잔만 더 하자며 늦은 밤까지 자리를 지켰던 시간들.


돌이켜보면 내가 좋아했던 것은 술 그 자체가 아니었다.

사람이 좋았고, 그 사람들과 마주 앉아 숨결을 나누던 시간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술장을 쉽게 정리하지 못한다.

술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술병 하나를 바라보면, 그 안에서 사람이 걸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집 술장에는 아직 장인어른이 계신다.

“한잔하시게”

술잔 가득 술을 따라주시던 따뜻한 손길이 그 안에 남아 있다.

“자네가 내 사위가 되어주어 참 고맙네”

그 다정한 목소리도 아직 거기 남아 있다.


나는 오늘도 술장 앞에 선다.

술병 사이로 사위를 바라보시던 장인어른의 환한 웃음이 아스라이 어린다.


그 시절이 그립다.


장인어른과 마주 앉아 나누었던,


그 따뜻한 한 잔.


그 한 잔이 참으로 그립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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