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물도 우리처럼 산다

오래 함께한 것에는 새것으로는 만들 수 없는 시간이 들어 있다.

by청산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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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을 가만히 둘러본다.

냉장고가 낮게 돌아가고 있고 한쪽에는 오래된 안마기가 놓여 있다.
바카라상 위에는 안경이 있고 주차장에는 십 년 넘게 함께한 자동차가 서 있다.

별것 아닌 물건들이다.


그런데 버리려고 하면 마음이 걸린다.

고장 난 물건을 들고 수리점을 찾을 때면 새것을 사는 것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나올 때도 있다.


그래도 고쳐 쓴다.

왜 그럴까.

아까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 물건을 처음 샀던 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처음 냉장고를 샀던 날, 그리고 아이들이 문을 열어보며 신기해하던 모습.

그 자동차를 타고 떠났던 수많은 여행.

젊은 날의 음악을 들려주던 오래된 오디오.


그래서 물건 하나를 버리는 일이 쉽지 않다.

그 물건과 함께했던 우리의 기억과 시간을 버리는 것 같아서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처음 만난 사람은 새 물건처럼 반갑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오래 함께하면 서로에게 흠집도 생긴다.

고장 나는 날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람에게 수리비를 계산하지 않는다.

조금 더 기다리고, 조금 더 참으면서 다시 맞춰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기 시작한다.

쓸모가 없어지면 멀어지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고,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쉽게 돌아선다.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알게 된다.

새것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고, 흠집이 있다고 다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래 함께한 것에는 새것으로는 만들 수 없는 시간이 들어 있다.


그래서 요즘은 사물을 조금 다르게 본다.

냉장고 한 대,
안마기 하나,
자동차 한 대,
보청기와 안경 하나에도 내가 지나온 시간이 들어 있다.


그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 보인다.

그때의 나와
그때의 가족과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이 보인다.


기쁨도 있고,
욕심도 있고,
화도 있고,
사랑도 있다.

그리고 이별도 있다.


사물은 아무 말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잊고 있던 시간을 대신 기억해준다.


그래서 이제는 물건 하나를 버릴 때도 조금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한다.


정말 버리는 것은 물건 하나인지,

아니면 그 안에 들어 있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내 시간인지.


사물도 우리처럼 산다.

오래 쓰이고,
조금씩 낡아가다가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난다.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