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 1
본격적으로 뭘 사야 하는지 이야기하기 전에, 3040 남성으로서 유행을 어떻게 볼지부터 한번 정리해 보자. 이 기준이 없으면 유행한다는 아이템만 하나씩 사들이게 되는데, 일 년 뒤에 옷장을 열어보면 그중 절반은 다시 손이 안 간다. 유행하는 브랜드와 모델명을 그대로 따라 사더라도, 지금 그게 유행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는 알고 사는 편이 오래 입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아이템 얘기에 들어가기 전에, 유행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짚고 넘어가려 한다.
유행은 돌고 돈다
유행이란 건 어디서든 시작될 수 있다. 디자이너의 컬렉션일 수도 있고, 어떤 인플루언서의 OOTD 이미지 한 장일 수도 있다. 시작점은 다양하지만, 그 씨앗이 진짜 '유행'으로 자리 잡는 경로 중 가장 강력한 건 하나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이 세대가 그걸 입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이 세대가 뭔가를 채택하는 순간부터 윗세대는 대체로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쟤들 왜 저러고 다니지?' 그런데 몇 년만 지나면 그 낯설던 옷차림은 조금 중화된 버전으로 다듬어져서 슬그머니 윗세대의 옷장까지 올라온다.
현시대 기준으론 와이드핏 바지가 딱 그런 경우다. 몇 년 전만 해도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 어린 세대를 보면서 나부터도 어색했다. 그런데 지금은 40대도 대체로 그런 바지를 입는다. 이 사실을 가장 실감 나게 보여주는 장면은, 옷에 관심이 1도 없는 내 동료 조 과장마저 작년부터 와이드핏 바지를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미 다수의 취향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유행을 처음 채택했던 어린 세대는 이미 또 다른 유행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애들이 유행을 만들면 윗세대가 그걸 가져가고, 애들은 다시 다음 유행을 찾는다. 이 세 박자가 반복되는 게 유행의 패턴이다.
이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대략 25년 전에 '드럼바지'라는, 지금과는 핏이 조금 다르지만 통이 매우 넓은 GV2라는 브랜드의 바지가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유행한 적이 있었다. 강남역의 모든 젊은이들이 펑퍼짐하고 긴 바지로 바닥을 쓸고 다녔다. 그다음 순서는 당연히 좁아지는 쪽이었다. 다만 한 번에 스키니로 직행하기엔 낙차가 너무 크니, 중간 단계로 부츠컷 계열이 한동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다음에야 스키니진이 왔는데, 드럼바지에서 스키니진까지 가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지금은 정확히 그 중간 과정, 와이드핏에서 부츠컷으로 넘어가는 길목쯤이 아닐까 싶다. 유행은 이렇게 진자처럼 왔다 갔다 하며 돌고 돈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있다. 르무통이나 스케쳐스 같은 신발 브랜드가 그렇다. 이런 브랜드는 젊은 층에서 먼저 뜨고 나서 윗세대로 번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윗세대가 고른 신발이다. 오래 서 있거나 많이 걸어도 발이 편하다고 하고, 튀지 않는 색이라 어디에나 무난하게 맞는것 같으니까. 멋을 부리려고 고른 게 아니라 편하자고 고른 것이다. 그 안전함이 입소문을 타면서, 이 흐름은 아래 세대로 건너오지 않고 처음부터 윗세대 안에서 옆으로 번져 나갔다. 이 신발을 신는 어린 친구들도 간혹 보이지만, 대부분은 어머니께서 편하다고 사 오신 신발을 군말 없이 신는 착한 아들, 딸일 것이다.
3040은 랭킹에 집착할 필요 없다
K-POP에 멜론 차트라는 게 있듯이, 우리가 가장 접하기 쉬운 패션 차트는 무신사의 랭킹이다. 무신사는 워낙 다수가 쓰는 플랫폼이다 보니, 그 랭킹에 오른 아이템은 이미 대중적으로 퍼질 대로 퍼진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지금 가장 많이 팔리고 있다는 건, 역설적으로 이미 유행의 정점이거나 끝자락에 와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랭킹은 유행이 만들어지는 진원지가 아니라, 유행이 다 퍼지고 난 뒤에 찍히는 결괏값에 가깝다.
그런데도 '지금 랭킹 상위에 있으니까'라는 이유 하나로 장바구니에 담기 쉽다. 하지만 순위는 남들이 얼마나 많이 샀는지를 보여줄 뿐, 그 옷이 내 체형에 맞는지, 내 옷장의 다른 옷들과 어울리는지, 내 생활에서 자주 입을 일이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남들이 많이 샀다는 사실이 내가 잘 입을 수 있다는 보장을 해주지는 않는다. 랭킹은 참고 자료로 보는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랭킹을 아예 무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쓰임새는 분명하다. 지금 옷장에 근본템으로 뼈대가 잡혀 있는 사람에게 무신사 랭킹은 "이 유행이 드디어 내 나이대까지 올라왔구나"를 확인하는 신호등 역할을 한다. 순서만 지키면 된다. 기본이 먼저고, 유행은 그 위에 얹는 쪽이다. 네이비 블레이저와 흰 옥스퍼드 셔츠, 청바지 같은 뼈대를 이미 갖춘 사람에게 랭킹 1위 후리스 한 벌은 기분전환 같은 양념이 되지만, 뼈대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 후리스 한 벌이 옷장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같은 랭킹을 보고 같은 아이템을 사도 결과가 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기본을 갖추고, 유행은 곁들이는 정도로
이 '얹기'가 꼭 새 아이템을 사는 걸 뜻하지도 않는다. 이미 있는 옷을 고르는 방식만 살짝 바꿔도 충분하다. 가령 요즘 오버핏이 유행이라면, 셔츠를 살 때 허리 라인이 잘록한 건 피하고, 사이즈도 L과 XL 둘 다 맞아서 고민될 때 좀 더 넉넉한 XL을 골라보는 식이다. 스타일을 통째로 바꾸는 게 아니라, 사이즈 선택 하나에 유행을 살짝 얹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여기에 팁을 하나 더 붙이자면, 유행만 슬쩍 본떠서 매우 저렴한 가격에 내놓은 아이템은 3040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딱 잘라 이야기할 순 없지만, 내 경험상 정가 기준 3만 원 이하의 상의, 5만 원 이하의 바지, 10만 원 이하의 아우터는 생산 단가를 낮추느라 부자재와 마감이 많이 떨어진다. SPA 브랜드가 아니라면 이 가격대 밑은 걸러도 괜찮다.
이렇게 유행이 돌고 돈다는 걸 알고 나면, 스타일별로 기준이 되는 근본 아이템을 몇 개 알아두는 게 편하다. 스트레이트 핏 청바지 하면 리바이스 501이나 505를 떠올리는 것처럼, 유행이 돌아올 때마다 그 스타일의 기준점 역할을 해주는 아이템들이 있다. 이런 아이템을 몇 개 기억해 두면, 유행이 몇 바퀴를 돌든 헤매지 않고 바로 그 시절에 맞는 옷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스타일별 기준이 되는 아이템을 잡아두고, 거기서 조금씩 변주를 주면 된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애들은 부츠컷을 입고 다니니, 내 옷장에 그런 유형이 없다면 '리바이스 517'을 검색해 볼 시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