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 4
음악을 예로 들어보자.
최신 유행하는 음악을 듣기는 쉽다. 고민할 것도, 애써 찾을 것도 없다. 다만 유행가는 수명이 짧다. 숏폼이나 방송을 타고 한두 달 반짝 뜨거웠다가, 다음 유행이 오면 금세 낡은 노래가 된다. 유행을 좇다 보면 플레이리스트가 1년만 지나도 손이 안 가는 곡들로 채워진다.
반대로 70년대 재즈만 깊게 파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세상이 어떤 음악에 열광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그 시대 사운드를 그냥 즐긴다.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한 장르를 오래 파고든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단단함이 있다. 유행을 좇으면 늘 한 발 뒤에서 따라가게 되지만, 한 장르를 묵묵히 파고들면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만의 색이 남는다.
패션도 마찬가지다. 마흔을 앞둔 조 과장이 20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미하라 야스히로 스니커즈를 용케 구해서 신고 있다고 하자. 발매 정보를 찾아보고, 리셀러를 뒤져가며 겨우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발이 왜 떴는지를 되짚어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지드래곤이 신으면서 퍼진 신발이다. 유행을 만드는 쪽에 선 사람에게는 남들이 아직 안 신는 신발이라는 사실 자체가 값어치다. 문제는 그 값어치가 신발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붙어 있다는 점이다. 이미 다 퍼진 뒤에 같은 신발을 신는다고 해서 그 자리까지 따라오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런 하입성 스니커즈는 유행 넘어가는 속도가 유독 빠르다. 몇 달 뒤엔 또 다른 이름의 스니커즈가 그 자리를 넘겨받는다. 그러면 애써 구한 이 신발도 신발장 구석에서 애매하게 자리만 차지하는 신세가 된다. 매 시즌 이렇게 트렌드를 쫓아다니다 보면 바쁘기만 하고 정작 자기만의 스타일은 잘 쌓이지 않는다.
반대로 유행의 속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발 하나만 붙잡고 파고드는 사람도 있다. 그는 아마 '레드윙' 같은 류의 브랜드를 좋아할 것이다. 매 시즌 바뀌는 디자인과 화려한 로고 대신, 거친 가죽으로 만든 아이언 레인저 한 켤레를 10~20년째 신는다. 1년만 지나도 촌스러워지는 유행 신발과 달리, 레드윙의 가죽은 접히는 부위마다 크랙이 잡히고 색이 짙어지며 그 사람만의 흔적을 남긴다. 게다가 굿이어 웰트 방식으로 만들어져 밑창이 닳은 뒤에는 리솔링으로 굽갈이를 할 수 있으니, 이론상 20대에 산 부츠를 40대, 50대가 되어서도 그대로 신을 수 있다. 한정판 신발이 흉내 내기 어려운 건 디자인이 아니라 이 시간이다.
매 시즌 새 스니커즈로 갈아타는 모습과, 레드윙 하나만 20년 가까이 신어 가죽이 짙게 죽고 굽이 자연스럽게 닳은 모습을 나란히 놓고 보면 마음이 가는 쪽은 아무래도 후자다. 유행 스니커즈는 아무리 최신이어도 애쓴 티가 먼저 보이고, 그마저도 매번 한 발 늦게 따라가는 모양이 된다. 반면 닳고 닳은 레드윙 부츠는 그 자체로 시간을 증명한다. 새 옷, 새 신발이 주는 인상은 짧고 얕지만, 좋은 신발을 오래 신어서 생긴 흔적이 주는 인상은 깊고 길다.
청바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장에 걸린 데님은 대개 공장에서 미리 물을 빼고, 가끔은 일부러 찢어 나온다. 세월을 입은 척하는 바지인 셈이다. 반면 풀카운트나 웨어하우스 같은 일본 데님 브랜드는 옛 방식 그대로 구형 직기로 짠 셀비지 원단을 고집한다. (물론 워싱진도 나오긴한다.) 물 한 번 안 거친 생지 데님은 처음 물에 담그면 허리도 기장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때문에, 살 때부터 그만큼을 계산해 한두 치수 넉넉하게 고른다. 바지 하나 사는 데도 몇 년 뒤의 모습을 미리 그려보는 셈이다. 그렇게 뻣뻣한 바지를 몇 년이고 입다 보면, 무릎 뒤엔 벌집 모양의 주름이, 허벅지엔 수염 같은 결이, 뒷주머니엔 지갑 자국이 저절로 새겨진다. 같은 공장에서 나온 같은 바지라도 입는 사람의 생활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바지가 된다. 해지면 기워 입으면 그만이다. 시간으로 쌓은 흔적은 돈으로는 흉내 낼 수가 없다.
3040이라면 흔한 브랜드와 아이템에 비싼 웃돈을 얹어가며 유행의 꽁무니를 쫓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 옷장에 옷이 많지 않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보다는 클래식의 본질을 묵묵히 지켜온 브랜드와 아이템을 파고들어 자기 연륜과 함께 익혀나가는 쪽이다.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내 몸에 맞는 기본을 단단하게 다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멋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