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에서 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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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에서 본까지(Von der Weimarer Verfassung zum Bonner Grundgesetz)


마크 트웨인의 명언으로 알려진

"History does not repeat itself, but it rymes(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운율을 맞춘다)."라는 문장은

시공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비극과 현대의 위기가 기묘할 정도로 닮은 박자와 리듬으로 전개될 때

역사에서 우리가 포착하고

배워야 할 지혜가 있을때 상기되곤 한다.

마크 트웨인이 세상을 떠나고 55년이 지나서야 잡지에 인용된 이 문장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며 널리 쓰이고 있다.

내가 저 문장을 처음 접한것은 파이낸셜 타임즈의 Martin Wolf 사설에서였다.

문장의 아름다움과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그 인용구를 통해 사설의 본질을 강화시켜 오랜 여운을 남기는 글이라 깊은 감동을 받았었다.

그 이후로 시간이 날때마다 그 인용구의 출처를 찾았는데 분산된 정보들만 쌓여갔다.

한참 지나 결국 찾아냈다.

1873년 출간된 도금시대(The Gilded Age: A Tale of Today)라는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History never repeats itself, but the kaleidoscopic combinations of the pictured present often seem to be made up of the elements of a shattered past."

역사는 결코 스스로를 반복하지 않지만, 이미지화된 현재의 만화경 같은 조합들은 종종 산산조각 난 과거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것 처럼 보인다.

훨씬 직관적이고.. 트웨인 스러운..

이 문장을 읽고서야 비로소 난 마크 트웨인이 그 오랜시간 저 문장의 주인으로 기억될만하구나 싶었다.

기묘할 정도로 닮아있는 인간사의 맥락과 인간군상의 패턴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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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거대한 톱니바퀴는 때로 인간의 사소한 오만과 복수심에서 시작된다.

1871년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프랑스 자존심의 심장부인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통일된 독일 제국(Deutsches Reich)의 빌헬름 1세(Wilhelm I.) 대관식을 감행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새긴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48년 뒤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정확히 그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으로

독일을 불러내 엄청난 배상금 (1,320억 골드마크)에 서명하게 했다.

이는 당시 독일 GDP의 몇 배에 달하는, 사실상 '영원히 갚지 말고 경제적으로 파산하라'는 선고였다.

당시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이 조약을 두고

패전국을 완전 절멸시키는 파괴적 평화인 카르타고식 평화(Carthaginian peace)라 평가했고,

이 과도한 배상금이 결국 독일의 복수심을 자극해 유럽을 다시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역시 케인즈는 케인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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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전쟁 당사국 간에도 관행이 있었다.

1815년 빈 회의 후 패전국을 철저히 짓밟기보다 체제 유지가 가능하도록 배려한 (‘과도한 전쟁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다’)유럽내 관행이 프랑스의 서슬 푸른 복수심 앞에 무력하게 깨져버린 것이다. 나폴레옹 때문에 유럽 전체가 20년 넘게 전쟁의 참화에 시달렸음에도 승전국(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은 패전국인 프랑스에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고, 어떤 배상금 청구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배상금보다 유럽 전체의 세력균형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도 냉혹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였지만

그는 배상금을 2-3년 안에 충분히 갚고 정상국가로 복귀할 수 있는 수준(50억 프랑)으로 제한했다.

프랑스를 영구적으로 파산시키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통일된 독일 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하려는 정치적 판단이 우선했기 때문이다.

결국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부과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국민들에게 극심한 경제적 고통과 영혼의 상처를 남겼다. 단순히 독일국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이 거대한 감정의 늪은

향후 도래할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라는 비극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그 혼돈의 폐허 위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바이마르 헌법(Weimarer Verfassung)이다.

당대 최고의 법학자와 정치학자들이 모여 만든 이 헌법은 인류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촘촘하며, 가장 진보적인 헌법적 설계도로 칭송받았다. 소수파의 의견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비례대표제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정교한 조항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 완벽한 설계도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었다.

시스템의 규칙인 법의 문구(Der Buchstabe des Gesetzes)는 정교했으나,

법의 정신(Der Geist des Gesetzes)을 사수하는 치밀함이 부족했던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헌법정신을, 제도를 지키고 싶어한다고 믿었던 것일까?

바이마르 헌법에는 그 시스템을 파괴하려는 행위자들의 악의를 방어할 '가장 최소한의 가드레일(Mindeststandard)'이 없었다.

바이마르 체제는 민주주의의 규칙을 활용해 민주주의 자체를 살해하려는 적들조차 '민주적 절차'라는 이유로 수용했다.

규칙의 틈새를 파고드는 행위자들의 공격 앞에, 촘촘했던 법전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가두는 완벽한 감옥이 된 것이다.

헌법이 민주주의가 민의의 반영이 아닌 선동의 무기가 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그 규칙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인물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대중은 그를 독일의 독재자로 기억하지만, 그는 본래 독일 시민권이 없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

히틀러는 1921년부터 나치당인 NSDAP(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spartei)의 당대표(Vorsitzender)였지만

1932년 초까지 무국적자(Staatenlos) 였다. 당시 독일법상 정당 가입과 국적 취득은 별개의 문제였기때문이다.

시민권이 없으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던 히틀러에게 합법적 활로를 열어준 것은 독일 중앙정부가 아니었다.

독일 정부의 하급 공무원으로 임용되면 자동으로 시민권이 부여된다는 법 조항의 틈새를 노려, 브라운슈바이그(Freistaat Braunschweig)의 나치당 계열 관료들은 히틀러에게 '행정 고문(Regierungsrat)'이라는 급조된 완장을 채워주었다.

히틀러는 이러한 미미한 제도적 방임의 부작용으로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재앙은 이처럼 거창한 헌법 개정이 아니라,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벌어진 사소한 편법과 제도적 방임이라는 무바카라임한 개인들의 합리화에서 '아주 작은 문'에서 시작되곤한다.

이 과정은 세계사에 중요한 단초가 되는 제도적 붕괴의 사례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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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빌헬름 2세 황제의 독일제국 시절에 만든

제국 및 국가국적법(Reichs- und Staatsangehoeringkeitsgesetz, RuStAG)의 제 14조와 15조에 보면

외국의 국적을 가졌거나 무국적자인 사람이 독일 주정부의 공무원(Beamter)으로 임용되면,

임용과 동시에 자동으로 독일 시민권이 부여되는 조항이 있었다.

당시 독일은 통일된 단일 국적 개념이 희박했다.

통일(1871)된지 30년이 채 되지 않는 연방국가의 연합체로 정신적인 통일에는 한계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해외 고급인재를 유입하고 국가에 대한 강력한 충성을 도모할 유인바카라이 필요했다.

귀화 절차를 수개월씩 밟게 하기 보다 공무원 임용이 되면 신속하게 패스트 트랙으로 행정을 처리해준 것이다.

당시 독일제국의 관료들은 국가가 철저히 검증한 엘리트 학자나 고위관료들에게만 이 특권이 주어질 것이라

남용될 리 없다고 자신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독일제국이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면서 이 조항은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작용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니더작센의 작은 도시인 브라운슈바이그 주정부를 나치당이 장악했다.

그들은 처음에 히틀러를 브라운슈바이그 공대의 문화학 교수 임용하려 했는데 학계와 여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들은 베를린 주재 주정부 대표부의 행정고문(Regierungsrat)(1932.2.25.)이라는 직바카라을 급조하는데 이 조항을 활용했다.

다음날 히틀러가 베를린의 호텔 카이저호프에서 브라운슈바이그 주정부 관료들 앞에서 공무원 서명을 하고 독일 시민권을 공식 취득한다.

그로부터 이틀 뒤(1932.2.28.) 그는 당당하게 독일 대통령 선거 후보에 공식 등록하고 출마를 선언했다.

말 그대로 단 이틀만에 무국적자 선동 당대표에서 법적인 독일 대통령 후보의 신분이 된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정이 가진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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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쿠데타나 총칼로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다.

그는 철저히 바이마르 헌법이 보장한 선거와 절차적 합법성을 밟아 권력의 정점에 섰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독자적인 과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최고 득표율은 37.3%, 1932.7월)

그럼에도 의회가 교착한 틈에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 엘리트 들과의 막후거래를 시도했고

연정을 통해 총리직을 따냈다.

히틀러에게 합법적 활로를 열어준 것은 변방의 작은 꼼수였지만,

결국 권력의 심장부를 통째로 넘겨준 것은 상층부 엘리트들의 오만과 무바카라임이었다.

힌덴부르크를 비롯한 당대 기득권들은 히틀러의 천박함을 경멸하면서도, 그의 대중적 인기를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려 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을것이라는 그 지독한 오만과 바카라임윤리의 실종이,

결국 촘촘했던 바이마르의 성채를 내부에서부터 완벽하게 붕괴시키는 종말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당연히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민주정 방식을 버렸다.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1월 30일)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의문의 대형 화재가 발생(1933.2.27)한다.

화재 바로 다음 날, 히틀러는 노쇠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압박해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대통령 긴급명령권)를 발동하게 한다.

이 명령이 바로 사실상의 계엄령인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령(Reichstagsbrandverordnung)'이다.

방화령을 통해 반대파 의원들을 대거 감옥에 가두거나 수배하여 의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 상태에서,

통치권을 정부에 위임하는 ‘수권법(Ermächtigungsgesetz)’을 가결(1933.3.23.)시켰다.

"의회의 동의 없이 정부(총리)가 마음대로 법을 만들고 헌법을 수정할 수 있다"는 이 법이 통과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의제는 완전히 종말한 것이다.

시스템의 규칙을 무기 삼아 권력을 장악한 뒤 그 민주적 정당성을 방패 삼아 민주주의 자체를 살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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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지도자가 가장 민주적이라 칭송받던 체제의 합법적 절차를 통과해 탄생했다니...

가장 민주적이라고 자부했던 바이마르 체제가 나치 독재를 탄생시킨 이 비극적 역설은 우리에게 서늘한 진실을 일깨운다.

결국 법전의 문구보다 중요한 것은 그 법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이며, 그 법을 다루는 '인간의 규범'이라는 점이다.

게임의 규칙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신의성실이 사라진 자리에서,

법은 권력자의 자의적 의지를 집행하는 가장 잔인한 무기가 될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잔해 속에서 독일의 헌법학자들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

즉 ‘방어적 민주주의(Streitbare Demokratie)’의 도입이다.

이들은 1949년 본(Bonn)에서 독일 기본법(Grundgesetz)을 제정하며,

과거 바이마르 체제처럼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헌법의 핵심 가치를 전복하는

'입법독재'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철벽을 세웠다.

그 핵심이 바로 제79조 제3항(Ewigkeitsklausel, 영구조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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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항은 원천적으로 변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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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e Änderung dieses Grundgesetzes, durch welche die Gliederung des Bundes in Länder, die grundsätzliche Mitwirkung der Länder bei der Gesetzgebung oder die in den Artikeln 1 und 20 niedergelegten Grundsätze berührt werden, ist unzulässig."

"연방을 각 주로 나누는 조직 변경, 각 주의 입법에 대한 원칙적 참여, 또는 제1조(인간의 존엄성) 및 제20조(민주공화국 등 체제의 근간)에 규정된 기본 원칙을 침해하는 헌법 개정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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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국회의 의석을 100% 장악하더라도,

다수결이라는 합법적 명분으로도 결코 바꿀 수 없는 불가역적 가이드라인을 제도화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횡포를 허용하는 맹목적인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권력의 절제라는 공화주의적 가치 위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통렬한 각성의 결과다.

법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

규칙의 틈새를 노리는 '헌법적 하드볼(Constitutional Hardball)*'이 일상화되고,

다수의 의지가 소수의 견제 장치를 합법적으로 파괴해 나갈 때,

우리는 그것이 1930년대 바이마르의 종말과 얼마나 닮아있는지 떠올려보아야 한다.

완벽해 보이는 성채의 문을 열어주는 것은 언제나 아주 작은 타협과 방심이며,

그 성채를 무너뜨리는 것은 총칼이 아니라 '다수결'이라는 이름의 합법적 투표용지다.

역사의 경고는 언제나 소리 없이, 그러나 완벽하게 되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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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적 강경전술(constitutional hardball)에 대해서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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