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는 하이네가 스승님 헤겔의 현학적인 꼰대스러움을 어떻게 유쾌하게 조롱했는지 살펴보았다. 밤하늘의 별을 '피부병'이라 치부했지만,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내심 '팁'을 바라는 생색쟁이로 살지는 말라던 헤겔.
나는 완고하고 꼰대처럼 보여도 적어도 자신이 말한대로 그 말을 지키면서 그대로 사는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하이네가 헤겔과 저녁 밤 별을 보며 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헤겔은 하이네를 알아본 것이고, 하이네도 헤겔을 존경한 것이다. 참고로 어제 헤겔의 임종시 마지막 한문장을 살펴봤는데 헤겔은 오늘 <Altus Solum I>에서 다룬 팬데믹이었던 콜레라로 1831년 세상을 떠났다. 철학의 황제도 전염병에 걸리면 죽는 것이다.
하이네와 헤겔의 인연이 너무나도 중요한 이유는 상아탑에 갇혀 있던 헤겔의 그 고루하고 무거운 철학을 광장으로 끌어내 세상을 뒤집어엎을 '혁명의 불씨'로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그 고루함을 가장 맹렬히 비웃었던 하이네였기 때문이다. 이 지적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843년의 프랑스 파리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1840년대 유럽, 특히 프로이센(독일)은 숨 막히는 억압의 시대였다. 프랑스 대혁명(1789)의 불길이 번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군주와 귀족들은 무자비한 검열의 칼날을 휘둘렀다.
권력의 위선을 찌르는 날카로운 글로 대중을 흔들던 하이네는 프로이센 정부의 표적이 되어 일찌감치 파리로 망명한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뒤, <라인 신문(Rheinische Zeitung>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정부의 빈곤 정바카라과 검열을 맹렬히 고발하던 스물다섯 살의 불같은 청년 역시 신문사가 강제 폐간당하며 짐을 싸야 했다. 이 청년의 이름이 바로 칼 맑스(Karl Marx)다.
https://blog.naver.com/altus_solum/224334975727
***한글로 맑스라 쓰는것도 표준어 표기가 아니고, 그렇다고 마르크스라고 쓰는것도 틀린 발음이라 그냥 여기서부터는 그냥 둘의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려한다. 참고***
이 둘은 엄마쪽으로 먼 친척지간이기도 하다. 칼의 엄마 헨레에테와 하인리히의 엄마 베티쪽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17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활약했던 '시몬 미하엘 프레스부르크(Simon Michael Pressburg)'를 비롯한 걸출한 궁정 유대인 가문의 형통이 나온다. 더욱이 조상이 같다는 것 외에도 두 사람은 프로이센 슬롯의 라인란트 출신으로 '아웃사이더(경계인)'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칼은 트리어, 하인리히는 뒤셀도르프 출신으로 모두 라인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다. 당시 프로이센 슬롯에서 유대인이 공직을 갖거나 출세하려면 기독교 개종이 필수였기때문에 칼의 아빠는 변호사를 계속하기 위해 칼이 태어나기 직전 기독교로 개종했고, 하인리히 역시 주류 슬롯에 진입하기 위해 20대에 스스로 개종을 선택했다. 하이네는 훗날 자신의 선택을 가리켜 "유럽 문화로 들어가는 입장권"이라고 씁쓸하게 자조했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1843년 파리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46세의 중년이된 하인리히와 25세의 청년 칼은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단숨에 서로의 영혼을 알아보는 벗이 되었다. 최고의 천재성을 가졌음에도 조국에서 온전히 주류로 대접받지 못한 '지식인의 설움', 보수적인 국가를 향한 '분노', 그리고 세상을 비딱하게 바라보는 '냉소적인 유머 감각'이 두 사람의 핏줄 속에 똑같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선후배 지식인의 교류가 아니라 조국에서 쫓겨나고 상처받은 두 천재의 운명적인 의기투합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이 둘의 만남이 세계사를 뒤바꾼 '찰나의 힘'이 된 이유는, 사실 두 사람의 대화 한가운데에 헤겔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네는 겉으로는 헤겔의 난해함과 보수적인 태도를 비웃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헤겔 철학의 천재성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헤겔이 만들어낸 '변증법(모순과 투쟁을 통해 세계가 발전한다는 논리)' 안에 시대를 뒤집을 파괴적인 엔진이 숨어있음을 직감했던 것이다. 다만 헤겔은 그 엔진을 '국가'와 '절대정신'이라는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틀 안에 정박시키려 했을 뿐이다. 반면 하이네는 특유의 직관으로 스승의 철학 속에 깃든 이 '투쟁과 변화'의 불씨를 꺼내어 맹렬한 청년 마르크스의 손에 쥐여주었다.
하인리히의 영감과 철학적 통찰을 흡수한 칼은 마침내 헤겔을 뒤집어엎는 거대한 도약을 이뤄낸다.
칼은 하늘(관념)에 둥둥 떠 있던 헤겔의 변증법을 끌어내려 차가운 땅(물질과 경제) 위에 단단히 세우고자 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를 둘러싼 '물질적 투쟁'이라는 사상. 이른바 '역사적 유물론'은 그렇게 시인과 철학자의 찰나적 연대 속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상상을 해본다. 만약 헤겔이 살아서 제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이토록 불온하게 써먹는 것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어떤 촌철살인을 남겼을까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어쩌면 그는 분노하기보다, 큰 눈을 깜빡이면서 창백한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헤겔 본인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개인은 누구나 그 시대의 아들이다. 철학 또한 마찬가지로, 사상으로 포착된 그 시대이다."
(Jeder ist ein Sohn seiner Zeit; so ist auch die Philosophie, ihre Zeit in Gedanken erfasst.)
<법철학 강요>
https://fishingproductfr.com/@24b21b72d8be455/35
헤겔이 혼란을 수습해야 했던 18세기의 아들로서 이성의 철학을 세웠듯,
칼은 끔찍한 빈부격차와 산업혁명의 모순을 마주한 19세기의 아들로서 세상을 뒤엎을 물질의 철학이 필요했을 뿐이다. 제자가 스승의 틀을 깨고 넘어섬으로써(반, 反), 역사가 한 단계 더 도약(합, 合)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헤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증명하고자 했던 '변증법'의 가장 완벽하고 생생한 실현이기 때문이다.
1843년 파리의 좁은 카페에서 만난 두 명의 망명객과 기꺼이 자신의 뼈대를 내어준 늙은 스승이 없었다면, 세상을 뒤흔든 망치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철학이란 저 멀리 상아탑에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이 발 딛고 선 '시대의 자식'이 되어 치열하게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잉태해 온 짙게 냄새 벤 인간지혜의 기록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역사를 굴려 온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방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