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틸리나의 오만과 공화국의 인내심
기원전 63년, 로마 공화정은 깊은 병증을 앓고 있었다. 귀족 출신이지만 실력과 덕성이 부족해 번번이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하던 카틸리나(Catilina)는, 정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쥘 수 없게 되자 체제 자체를 전복하고 집정관 키케로(Cicero)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사적인 탐욕을 채우려 했던 이 함량 미달의 정치가는, 뻔뻔하게도 원로원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유는 단 하나, "어차피 '명백한 물증'이 없다"는 오만함 때문이었다. 그는 로마 공화정의 '무죄 추정의 원칙'과 귀족들을 향한 관대한 제도를 뼛속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의혹을 '정치적 탄압'으로 몰아가고, 다른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끝까지 결백한 척 연기를 하기 위해 뻔뻔하게 회의장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공화정을 파괴하려는 자가 공화국의 제도를 방패 삼아 당당히 의석에 앉는 그 기괴한 뻔뻔함 앞에서, 키케로는 탄식했다.
"카틸리나여, 대체 언제까지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할 작정인가?
(Quousque tandem abutere, Catilina, patientia nostra?)
너의 그 뻔뻔함은 도대체 어디까지 치솟을 것인가?"
(Quem ad finem sese effrenata iactabit audacia?")
기원전 63년 11월 8일, 키케로가 로마 원로원에서 발표한
《카틸리나 탄핵 연설(Oratio in Catilinam)》 중
'제1연설'의 첫 문장
카틸리나 반박 연설문(In Catilinam I-IV)
키케로는 감정적인 욕설을 뱉지는 않았다. 그럴만한 가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실력 없이 편법으로 공화국의 제도를 해킹하려는 자의 탐욕이 어떻게 국가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고발했을 뿐이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공화국 조종석 주변을 기웃거리는 작금의 '현대판 카틸리나'들을 향해 우리는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기괴한자들은 국가 시스템의 인내심을 시험할 작정인가? 이들은 위성정당 등 기형적 편법으로 의회에 밀항해 정당정치를 형해화하더니, 이제는 '겸직 금지 조항이 없다'는 궤변을 방패 삼아 입법부의 세비와 행정부의 장관 월급을 동시에 탐하는 기막힌 '이중취식'을 선언했다.
□ 몽테스큐의 경고 : 권력이 결합할 때 자유는 소멸한다
이들의 행태가 단순한 도덕적 일탈을 넘어 국가 시스템에 대한 치명적 반역인 이유는, 근대 민주주의의 심장인 '삼권분립'을 정면으로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몽테스큐(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1755)는 그의 저서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1748)>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동일한 사람이나 동일한 관직 기구 안에 입법권이 행정권과 결합될 때, 자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일한 군주나 동일한 의회가 폭압적인 법을 만들어 그것을 폭압적으로 집행할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Lorsque dans la même personne ou dans le même corps de magistrature, la puissance législative est réunie à la puissance exécutrice, il n'y a point de liberté ; parce qu'on peut craindre que le même monarque ou le même sénat ne fasse des lois tyranniques pour les exécuter tyranniquement."
<제11권 6장, 영국의 헌정에 대하여(De la constitution d'Angleterre)>
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입법부의 일원이 스스로 행정부의 수장이 되어 자신의 권력을 옹호하는 것은 삼권분립의 원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현역 의원의 입각이라는 악습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인사청문회의 문턱을 쉽게 넘기 위해 의원 불패의 관행에 기대는 얄팍한 타협은 이미 정치권의 고질병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재인 '비례대표' 제도를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로 2번이나 농락하며 의회에 입성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오직 정당정치의 기형적 혜택으로 배지를 단 자가, 다음 순번에게 의원직을 양보하는 최소한의 헌법적 관행마저 무시한 채 장관직을 겸하겠다는 것은 어떠한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입법권과 행정권을 한 사람의 손에 쥐겠다는 노골적인 전체주의적 발상도 끔찍하지만, 최소한의 직무적 전문성조차 입증한 적 없는 자를 버젓이 추천하는 행태나, 그 제안에 응하는 태도 자체가 수준을 그대로 드러낸다. 몽테스큐가 그토록 경계했던 '권력의 사유화'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 직의 타락과 관료제의 모멸감
이 적반하장의 안하무인들이 권력을 독식할 때, 가장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은 국가의 뼈대인 관료제다.
국가의 행정조직은 수백, 수천 명의 직업 공무원들이 엄격한 고시를 통과하거나 학위를 갖추고, 어떤 방식으로든 법률이 부여한 규율 속에서 묵묵히 국정을 지탱하는 공적 헌신의 공간이다. 그런데 어떤 공적인 자격이나 경륜도 없이, 오직 제도의 허점을 찌르는 편법으로 살아남은 자가 하루아침에 이들의 수장으로 수직 낙하한다.
여전히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관료들 위에, 룰의 맹점을 해킹해 '신흥 귀족'으로 군림하는 자가 앉아 지시를 내리는 기괴한 풍경. 이때 현장의 공무원들이 느끼는 것은 단순한 박탈감이 아니라 공직 슬롯 전체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지독한 모멸감이다. '직'의 가치가 지나가는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을 때, 국가를 향한 헌신과 바카라임 윤리는 증발한다.
한때 장차관은 존경받는 자리였던 적이 있었다. 차근차근 벽돌 쌓듯이 올라가면 그 선배의 앞길을 보며 바카라임과 조직에 대한 헌신을 다하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그때도 정무직 장관은 존재했지만, 국무위원이라는 인물들의 격이 이토록 처참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학위나 이력서에 적힌 스펙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 절망적인 대목은, 이들 스스로도 자신이 그 무거운 자리를 감당할 수 없음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정 운영의 전문성도, 거시적인 철학도 없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오직 "주어졌으니 일단 한 번 해먹고 보자"는 맹목적인 욕심만이 번뜩인다.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 진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단순한 '무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공직이 요구하는 엄중한 바카라임에 대한 최소한의 두려움조차 상실한 '염치의 증발'이자, 국가를 자신의 전리품쯤으로 여기는 '천박한 기회주의'일 뿐이다.
더욱 치명적인 국가적 비극은, 이 지독한 모멸감이 끝내 '관료 슬롯의 정치화와 체념'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스스로 무능함을 아는 자들이 권력의 단맛을 좇아 윗자리를 점령하고, 정직하게 벽돌을 쌓아 올리는 헌신이 조롱받을 때 관료들은 직업적 영혼을 잃게 된다. '더러운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현재 권력을 쥔 곳에 줄을 서자'는 자조 섞인 냉소주의가 관료슬롯를 무섭게 잠식하고 있다.
정권은 유한하나 관료제는 공화국을 지탱하는 영속적인 척추다. 누가 권력을 잡든 이 뼈대가 정치 논리에 오염되어 무너지는 순간, 국가의 행정력은 보편적 '국가이성'을 잃고 권력자의 사병으로 전락하고 만다. 무지와 탐욕으로 룰을 파괴한 자들이 뿜어내는 독기가, 국가의 중추 신경마저 스스로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 카틸리나의 최후
카틸리나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제도를 방패 삼아 뻔뻔하게 의석을 지키려던 그는, 자신의 위선이 만천하에 발가벗겨지자 주변 의원들의 차가운 멸시 속에 완벽히 고립되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날 밤 로마에서 도망친 카틸리나는 이듬해 공화국 정규군과의 '피스토리아 전투'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로마 공화정은 룰을 비웃는 무임승차자의 오만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체제의 면역력을 발동해 그를 단호하게 응징했다.
기성 정치권은 작금의 기막힌 모순을 향한 청년 세대의 분노를 '극우화'나 '젠더 갈등' 같은 손쉬운 프레임으로 덮어버리려 한다. 그러나 이 분노의 본질은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정직하게 노력한 자들을 조롱하며 룰을 파괴한 자들이 오히려 시대의 승자로 군림하는 위선"에 대한 인간적 존엄성의 항거다.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힘이 법전의 글귀가 아니라 시민들의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에 있다고 보았다. 로마는 깨어있는 지식인의 고발과 공화국의 헌법적 관행을 지키려는 자정 능력을 통해 카틸리나를 단죄했다. 반면, 헌법적 관행을 무시하고 염치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스스로 국가의 조종석을 내어준 우리의 공화국은 이미 도덕적 파산 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다.
36. '마음의 습관(habitudes du .. : 네이버블로그
바깥에서는 거대한 지정학적 격랑과 핵무기의 위협이 국가의 명운을 조여오고 있는데, 안에서는 몽테스큐를 조롱하는 무자격자들이 이중취식을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삼권분립의 주춧돌을 스스로 뽑아내며 카틸리나의 탐욕을 방치하는 국가는, 결코 외부의 서늘한 역사를 견뎌낼 수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는 저 고삐 풀린 뻔뻔함을 지켜봐야만 할까?
글을 맺으며, 문득 2천 년 전 로마의 카틸리나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고 싶어진다. 작금의 무임승차자들을 그의 이름에 빗댄 것 자체가, 어쩌면 지독한 굴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카틸리나는 비록 공화국을 전복하려 한 역적이었으나, 적어도 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서 공화국 정규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인물이었다. 그의 오만함에는 최소한 목숨을 건 묵직한 비장함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공화국을 유린하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비장함이나 야성조차 없다. 그들은 전장에 나설 용기도, 룰을 정면으로 부술 담력도 없다. 오직 '위성정당'이라는 기형적인 텐트 뒤에 비겁하게 숨어 제도의 맹점을 파고들고, "겸직 금지 조항이 없다"는 얄팍한 핑계로 의원 배지와 장관 월급을 동시에 구걸하는 생계형 기회주의자들에 불과하다.
Karl Marx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Der 18te Brumaire des Louis Napoleon, 1852)>에서 헤겔의 말을 빌려 이렇게 썼다.
"역사적 대사건과 인물들은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Tragedy)으로,
다음 한 번은 비루한 희극(Farce)으로."
"Hegel bemerkt irgendwo,
daß alle großen weltgeschichtlichen Tatsachen und Personen sich sozusagen zweimal ereignen. Er hat vergessen, hinzuzufügen: das eine Mal als Tragödie, das andere Mal als Farce."
기원전 63년 로마의 카틸리나가 공화정을 덮친 거대한 '비극'이었다면, 2026년 대한민국의 현대판 카틸리나들은 공화국의 조종석을 좀먹는 한 편의 허접한 ‘희극'이다. 목숨을 걸었던 로마의 반역자 이름 앞에, 권력과 월급을 이중으로 탐하는 아수라장 안하무인들을 소환해야만 하는 이 희극적 현실이야말로 대한민국 관료제와 정직한 청년들이 마주한 진짜 비극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