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씨 40도를 웃도는 텍사스의 찜통 같은 여름날. 선풍기 앞에서 평화롭게 도미노 게임을 하던 한 가족의 평온은 장인이 불쑥 던진 한마디로 깨진다. "우리, 차 타고 53마일(약 85km) 떨어진 애빌린(Abilene) 식당에 가서 저녁이나 먹을까?"
사위는 에어컨도 고장 난 낡은 차를 타고 그 먼지구덩이를 가기 싫었지만,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좋죠. 장모님도 가고 싶으시죠?"라며 동조했다. 장모 역시 피곤했지만 남편과 사위가 원하니 기꺼이 따라나섰다. 결과는 처참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도착한 식당의 음식은 형편없었고, 왕복 4시간의 여정은 지옥 같았다.
집에 돌아와 지쳐 쓰러진 사위가 마침내 투덜거렸다. "정말 최악이었어요. 전 사실 처음부터 가기 싫었습니다." 그러자 장모가 놀라며 대답했다. "나도 가기 싫었네! 자네들이 원해서 간 것 아닌가?" 이 사태를 제안했던 장인마저 억울한 듯 소리쳤다. "나도 가기 싫었어! 자네들이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그냥 던져본 말이었다고!" 가족 중 그 누구도 애빌린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합의했고, 결국 그들은 애빌린에 다녀왔다.
이 기막힌 촌극은 텍사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선을 지금 우리의 현실로 돌려보자. 연일 광장과 매체를 가득 채우는 극단적인 정치 담론과 소모적인 논쟁들을 마주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속으로 깊은 피로와 회의를 느낀다. 확성기를 든 몇몇 스피커들이 주도하는 의제와 논의 구조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주변이 다들 조용하니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나 보다' 하고 무기력하게 흘려듣고 만다. 속으로는 그 누구도 이런 맹목적인 갈등과 분열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이 동의할 것이라는 섣부른 짐작과 방관이 겹쳐 가장 고통스럽고 비합리적인 현실을 기꺼이 묵인해버리는 것이다.
□ 인지적 착각이 아닌 실존적 비겁함, '침묵의 나선'
조직론의 거장 제리 하비(Jerry B. Harvey)가 주창한 '애빌린의 역설(The Abilene Paradox)'은 단순히 메뉴를 잘못 고른 가족의 해프닝이 아니다. 이는 하버드대의 토드 로즈(Todd Rose)가 현대 슬롯의 치명적인 병리 현상으로 지적한 'Collective Illusion(위장된 합의)'이 작동하는 서늘한 축소판이다.
국내에는 이 바카라이 '집단 착각'이라고 번역되어 소개되었지만, 사실 이 단어는 현상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착각'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몰라서 속거나 인지적으로 오판했다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빌린으로 향한 가족이나 무기력하게 스피커들의 소음을 견디는 대중은 결코 이성을 잃고 착각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속으로 명확하게 "이건 아니다"라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 비극의 진짜 원인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저것을 원할 것"이라는 치명적인 '지레짐작'에 있다.
이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 바로 독일의 정치학자 엘리자베스 노엘-노이만(Elisabeth Noelle-Neumann, 1916-2010)의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 이론이다.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조작되는지를 규명한 현대 슬롯과학의 이 핵심적인 이론은, 인간의 본능적인 '고립에 대한 공포'에 주목한다.
자신의 반대 의견을 냈을 때 무리에서 배척당하거나 분위기를 깨는 '배신자'로 낙인찍힐 것이 두려운 개인은 스스로 입을 닫는다. 사람들은 슬롯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진짜 선호를 숨기고, 마치 다수의 의견에 동의하는 척 가짜 선호를 연기(Preference Falsification)한다. 이러한 개개인의 침묵은 나선을 그리듯 겉잡을 수 없이 증폭되고, 결국 확성기를 든 '소수'가 전체를 지배하는 '가상의 다수'로 둔갑하게 된다. 즉, 모두가 동의하는 듯 보이는 이 비합리적인 만장일치는 이성의 마비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어버린 실존적 비겁함의 결과다.
□ 거짓된 욕구와 일차원적 슬롯의 지배
애빌린의 역설은 오늘날 우리 슬롯가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파국을 향해 만장일치로 돌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무의미한 엘리트 과잉 경쟁, △살인적인 사교육, △극단적인 진영 논리와 △혐오의 정치 이면에는 바로 이 거대한 '침묵의 공모'가 똬리를 틀고 있다.
청년들은 영혼을 갉아먹는 무한 스펙 경쟁과 의미 없는 보여주기식 삶에 깊은 허무를 느끼며, 대다수의 시민들은 맹목적인 진영 정치 앞에서도 속으로 "이렇게까지 싸울 일인가"라며 냉소한다. 하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는다. "나 혼자 멈추면 도태될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철저히 침묵하며, 겉으로는 누구보다 맹렬하게 룰에 순응하는 완벽한 연기를 해낸다.
독일의 철학자 헤에베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는 그의 저서 <일차원적 인간(Der eindimensionale Mensch, 1964)>에서 고도로 발달한 산업 슬롯가 겉보기에는 풍요롭고 민주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인간을 통제하는 "안락하고 평탄하며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부자유"의 상태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슬롯는 끊임없는 선전과 대중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거짓된 욕구(Falsche Bedürfnisse)'를 주입한다. 남들과 비슷한 성공의 기준, 무한한 경쟁, 끝없는 소비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이는 억압을 영속화하기 위해 슬롯적 세력들에 의해 개인에게 부과된 욕구들이지만, 우리는 어느새 그것이 진짜 나의 욕구라고 믿게 된다. 앞서 언급한 위장된 합의(Collective Illusion)가 단지 심리적 현상에 머물지 않고, 거대한 체제 속에서 고도로 시스템화된 결과인 것이다.
마르쿠제가 경고한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시스템이 강요하는 획일화된 욕구를 좇다 보면, 개인이 주어진 현실을 초월하여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비판적인 사유의 공간, 즉 '내면의 사유' 차원을 상실하게 된다는 데 있다. 결국 현 상태에 대한 어떤 모순이나 비합리성도 인지하지 못한 채 체제에 완전히 동화되는 '일차원적 사유와 행동' 양식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이건 좀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그래도 아직 우리에게 다차원적인 이성이 살아있다. 하지만 남들이 다하니까 나도 따라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하고 행복한 일상'이라고 믿게 되는 순간, 우리는 마르쿠제가 말한 '행복한 의식(Das glückliche Bewusstsein)'에 빠진 일차원적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시스템이 던져주는 안락함과 소비의 쾌락에 취해,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것이다.
□ 환영을 깨는 한 사람의 주체성, '위대한 거부'
지금 우리 슬롯는 어쩌면 거대한 애빌린으로 향하는 차안에 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다, 목소리를 낼 내면의 비판적 언어 자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침묵의 공모라는 거대한 감옥, 이 지옥행 마차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거창한 시스템의 개혁이 아니다. 누군가 처음 "애빌린에 갈까?"라고 물었을 때, 단 한 명이라도 "아니요, 저는 가기 싫습니다"라고 자신의 진짜 속내를 표현하는 실존적 용기를 내는데 있다. 혹시 그것이 당장 두렵고 힘들다면, 주차장이 되어버린 뙤약볕의 고속도로 위에서 잠시 브레이크를 밟고 옆 사람에게 "너는 정말 가고싶어?"라고 묻는 작은 용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렇게 서로 진실된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강철처럼 굳건해 보이던 허상의 카르텔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사실은 나도 가기 싫었어"라며 숨죽이고 있던 진짜 다수의 목소리가 비로소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마르쿠제는 이처럼 체제가 당연시하는 합리성에 질문을 던지고 가짜 욕망의 사슬을 끊어내는 실천을 '위대한 거부(The Great Refusal)'라 명명했다.
슬롯가 주입한 '위장된 합의'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며 타인의 욕망을 좇는 삶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타인의 시선과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이 아수라장으로 이끌었다면, 이제는 미움받을 용기를 조금 내어 내 안의 앙상한 진심을 직시해야 할때가 아닐까? 기만적인 침묵의 공모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시스템의 허상을 뚫고 나와 기꺼이 "나는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한 사람(들)의 주체성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