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관계의 교집합

Intersection of Interests

byAltusSolum

이해관계의 교집합(Intersection of Interests)


정치, 계층, 세대, 성별, 그리고 부동산까지. 어딜 둘러봐도 갈등이다. 바야흐로 '갈등의 시대' 한복판에 살고 있다. 그런데 문뜩 우리는 '갈등'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궁금해졌다. 우리는 어쪄면 갈등을 반쁨은 오해하고 있다. 갈등을 그저 '친구 사이의 말다툼'이나 '일시적인 의견 차이' 정도로 가볍게 치부하거나, 반대로 엑셀 표로 계산해 보상금 몇 푼 쥐여주면 해결될 행정적 오류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정치학적, 슬롯학적 관점에서 갈등은 결코 치료해야 할 '질병'이나 수정 가능한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희소한 자원과 권력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필연적인 쟁탈전이자, 누구의 가치관이 이 슬롯의 '표준(Rule)'이 될 것인가를 다투는 치열한 권력 투쟁이다. 특히 현대 슬롯의 갈등은 과거처럼 파이(자원)를 나누는 단순 계산의 문제를 이미 오래전에 넘어섰다. 그것은 내 존재에 대한 인정, 소외감에 대한 두려움이 맹렬하게 뒤엉켜 타인에게 비주류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실존의 투쟁'으로 진화했다.


갈등의 본질을 이토록 피상적으로 정의하고 오판해 왔기에, 우리의 갈등 관리는 번번이 실패하고 슬롯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수십 년간 갈등을 '유예'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외과 수술의 목적은 병의 근원, 예를들어 암세포라는 근원적 환부를 정확히 도려내는 데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갈등 관리는 원인(암 덩어리)은 그대로 둔 채, 진통제를 놓고 겉치레 반창고만 붙이는 기만적인 처방의 연속이었다. 물론 갈등위원회를 발족하고 행정적 협의체를 꾸리는 절차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복잡한 의견을 수렴할 최소한의 제도적 그릇은 분명 필요하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외형적 장치를 마련한 것만으로 갈등이 봉합되었다고 착각하는 행정적 안일함에 있다. 위원회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면피용 알리바이로 삼아 본질과의 대면을 회피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갈등의 진짜 원인인 사람들의 내밀한 두려움과 욕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속절없이 곪아 터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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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인의 시선이 꿰뚫어 본 갈등의 심연

이 거대하고 파괴적인 갈등의 맨얼굴을 누구보다 서늘하게 직시한 두 명의 학자가 있다. 정치철학자 샹탈 무프(Chantal Mouffe, 1943- )와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아만다 리플리(Amanda Ripley, 1973- )다. 우연하게도 이 두 저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슬롯학적으로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물론 오늘날의 복잡다단한 역학 속에서 단순히 '여성=소수'라는 기계적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1943년생인 무프와 1973년생인 리플리가 학계와 언론계라는 공론장에 진입하고 치열하게 생존해야 했던 시대적 배경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굳건한 정치·행정 시스템 안에서 필연적으로 '비주류의 감각'을 체화하며 시대를 관통해 온 인물들이다.


철학의 '관점 인식론(Standpoint Epistemology)'은 바로 이 지점의 차이를 설명해 준다. 슬롯 시스템이 자신들에게 익숙하고 유리하게 설계된 주류 기득권은 갈등을 '시스템의 일시적 오류'나 '숫자로 계산 가능한 이익의 충돌'로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행정 관료들이 끊임없이 기계적이고 얄팍한 '갈등관리 매뉴얼'을 만들어내는 이유다.


반면, 주류의 룰에 적응하면서도 동시에 그 시스템의 바깥을 인지해야 했던 '경계인'의 경험적 위치는 갈등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보게 만든다. 이들은 갈등이 엑셀 표 위의 숫자 문제가 아니라, '내 존재가 배제되고 부정당할지 모른다'는 뼈아픈 소외감과 두려움의 심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시한다. 이 차갑고도 예민한 감각을 통해 두 학자는 갈등을 적당히 덮어두려는 기득권의 위선을 찢어내고, 인간이 단순히 이익 때문이 아니라 정체성과 실존을 걸고 싸운다는 그 진짜 맨얼굴을 예리하게 입체화해 낸 것이다.


□ 고도의 갈등(High Conflict)과 대의명분이라는 함정

아만다 리플리는 저서 <극한 갈등(국내번역 표제), (High Conflict, 2021)>에서 현대의 갈등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과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정밀하게 해부한다. 그녀에 따르면, 갈등이 해결 불가능한 늪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갈등 당사자들이 '대의명분'이라는 마약에 취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보상금 문제나 입지 문제로 시작된 갈등도, 시간이 지나면 '정의, 인권, 환경, 민주주의'라는 거창하고 숭고한 가치의 외투를 입는다. 문제는 신념과 명분은 반으로 쪼개거나 타협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이 '절대 선'이 되는 순간, 타협은 곧 악에 굴복하는 배신이 된다. 이 지점에 도달하면 사람들은 원래 무엇 때문에 싸우기 시작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오직 상대방의 파멸만을 목적으로 삼는 '고도의 갈등'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대중의 분노를 먹고사는 '갈등 조장자'들은 이 명분의 불씨에 끊임없이 기름을 부으며 진영 논리를 공고히 한다.


□ 합의의 환상을 깨고 '경합(Agonism)'의 링으로

그렇다면 이 맹목적인 성전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 샹탈 무프는 대화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완벽한 합의'라는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고 일갈한다. 억지로 봉합된 합의란 결국 힘 있는 자가 소수의 목소리를 묵살해버린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무프는 자신의 바카라 <경합들(2013)>에서 상대를 무조건 척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적대(Antagonism)'의 상태를,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링 위에 존재할 권리가 있는 경쟁자(Adversary)로 인정하는 '경합(Agonism)'의 상태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갈등 관리의 진정한 목표는 갈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십자군 전쟁의 칼을 내려놓고 '이해관계를 다투는 협상가'로서 서로를 링 위에 세우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종교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부르짖는 그 숭고한 '대의명분'을 기꺼이 테이블 아래로 내던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격정적이고 피 튀기지만 합법적인 이익의 쟁탈전으로 싸움의 성격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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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장을 버리고 '이해관계의 교집합'을 발라내라

대의명분의 거품을 걷어내고 경합의 링 위에 섰다면, 이제 갈등관리의 진짜 본질이 등장한다. 바로 거대한 욕망들 사이에서 '서로가 생각하는 이해관계의 교집합(Intersection)'을 날카롭게 발라내는 것이다.


이는 하버드 협상 프로젝트를 이끈 로저 피셔(Roger Fisher, 1922-2012)가 <YES를 이끌어내는 협상법(Getting to Yes)>에서 강조한 핵심 원칙, "입장(Positions)을 버리고 이해관계(Interests)에 집중하라"와 완벽하게 궤를 같이한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타협할 수 없는 거창한 명분과 입장(Position)을 내세우지만, 그 밑바닥에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경제적 불안, 미래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 같은 진짜 이해관계(Interests)가 숨어 있다.


갈등 관리는 도덕적 우월성을 가리는 재판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입장'은 정면으로 충돌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앙상한 '이해관계'를 파고들면 반드시 겹치는 교집합이 존재한다. 뜨거운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있는 당사자들에게 찬물을 끼얹고, "그래서 당신이 현실적으로 얻고자 하는 진짜 이익이 무엇인가"를 냉정하게 직시하게 만들어 이 차가운 교집합을 도려내고 합의의 파이를 키워내는 것. 이것이 진짜 갈등관리다.



□ 위선을 벗겨낸 차가운 프로페셔널의 태도

현대 슬롯의 갈등은 누군가 악해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거창한 가치관으로 포장하려는 인간의 본성과 위선이 충돌하기 때문에 폭발한다.


결국 진정한 갈등 관리란, 숭고한 척하는 대의명분이라는 화려한 옷을 기꺼이 벗겨내고, 다소 초라하더라도 지극히 솔직하고 세속적인 서로의 이해관계를 직면하게 만드는 고도의 심리적·정치적 작업이다. 명분을 내려놓는 것은 비겁한 패배가 아니라, 파국을 막고 현실적인 대안을 창조하기 위한 가장 치열하고 성숙한 실존적 결단이다. 우리를 맹목적인 갈등의 늪에서 구원하는 것은 뜨거운 십자군의 명분이 아니라, 서로의 본심을 인정하고 이해관계의 교집합을 발라내는 차갑고 냉혹한 협상의 철학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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