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정색해도 세상은 안 망하더라고
가짜 미소를 걷어내면서 한 가지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억울함에 파묻혀 내 자리를 영원한 피해자로 못 박지 않는 것.
무례한 말을 듣고도 웃었고 싫은 부탁도 넙죽 받았다. 돌이켜보면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투성이다. 하지만 그 억울함을 오래 붙잡고 있다 보면 마음은 아주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
‘나는 왜 맨날 당하고만 살까’
‘사람들은 왜 나한테만 이렇게 함부로 굴지.’
처음에는 이 생각들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그 억울한 늪에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인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겪은 상처가 가벼웠다는 뜻이 아니다. 분명 불쾌했고 화가 났다. 다만 그 사실을 훈장처럼 쥔 채 평생 억울한 피해자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나 역시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었다. 나는 단지 갈등이 싫었다. 상대의 굳은 표정을 보는 것도 거절한 뒤 찾아올 싸늘한 공기도 피하고 싶었다. 따지고 설명하는 수고로움보다 그냥 한 번 웃어넘기는 편이 훨씬 쉬웠다. 그래서 스스로 웃음을 선택했다.
선을 넘은 건 무례한 사람의 잘못이다. 하지만 그 순간 억지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한 건 내 선택이었다. 상대의 무례함을 내 탓으로 자바카라할 필요도 없지만 나의 비겁했던 선택까지 전부 세상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착해서 당한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당장은 달콤한 위로가 된다. 하지만 그 핑계 뒤에 숨어 있으면 나는 영원히 억울한 사람으로 남고, 다음번에도 갈등을 피하기 위해 똑같이 바보처럼 웃고 말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갈등을 피하려고 웃는 못된 습관을 가졌던 사람이고 이제 그 습관을 고치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 억울함에서 한 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에는 웃지 않을 수 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고 어색해진 공기를 굳이 내가 나서서 수습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다음번의 나에게 조금 더 나은 선택을 쥐여주기로 했다. 억울한 일은 억울한 일대로 똑똑히 기억하되 피해자의 자리에 계속 주저앉아 있지는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