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내 자리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안면 근육에 들어간 힘을 완전히 빼고 그저 숨만 쉬며 타이핑에 집중하고 있던 참이었다. 가끔은 에너지를 철저히 아끼기 위해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고 얼굴의 모든 근육을 쓰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일만 처리하고 싶은 그런 시간. 그때 지나가던 상사가 불쑥 말을 건넸다.
“뭔 일 났어? 표정이 왜 그래?”
그 가벼운 질문 하나에 나의 뇌는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척수 반사처럼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나는 황급히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진 과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엥? 아니요?!! 하핫…”
상사는 “그래? 기분 안 좋은 줄 알았네”라며 자리를 떴고 나는 그제야 억지로 끌어올렸던 입꼬리를 슬그머니 내릴 수 있었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우울하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불만이 있지도 않았다. 안면 근육을 끌어올릴 최소한의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얼굴을 내버려 두고 있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 잠잠한 상태를 너무나 쉽게 '화가 난 것'이나 '불만이 있는 것'으로 지레짐작해 버린다.
대체 나는 왜 아무 잘못도 없이 방전되어 있던 순간조차 상사의 섣부른 오해 한마디에 반사적으로 광대를 끌어올려야 했을까?
심리학에서는 이런 모습을 타인에게 미움받거나 불편한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려워 내 감정보다 상대의 편안함을 먼저 챙기는 행동이라고 본다.
나 역시 그랬다. 상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다루기 편하고 싹싹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내 기분과는 무관하게 타인이 안심할 만한 표정을 억지로 꾸며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댄다.
외근을 나가 낯선 거래처 사무실 문을 열기 직전, 문고리를 잡은 채 작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반사적으로 밝은 표정을 덧씌우는 것처럼 말이다. "안녕하세요~!" 하며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문을 여는 그 순간, 미소는 일종의 슬롯적 갑옷이자 유니폼이 된다.
문제는 숨 막히는 이 유니폼을 잠시 벗어두고 쉴 틈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슬롯가 타인의 무표정에 대해 얼마나 박하고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미디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인들을 보라. 찰나의 순간에 찍힌 무표정한 캡처 사진 한 장이나 며칠 밤을 새운 피곤함이 묻어난 짧은 인터뷰 영상 하나를 두고 대중은 가차 없이 돌을 던진다. ‘초심을 잃었다’, ‘싸가지가 없다’, ‘거만해졌다’는 꼬리표가 순식간에 따라붙는다.
그들의 진짜 감정 상태나 신체적 피로도가 어땠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싹싹하고 밝은 미소’를 내내 서비스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비난의 정당한 사유가 된다. 카메라 앞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웃지 않음 = 인성 논란’으로 직결되는 이 기형적인 잣대는 우리 슬롯가 무표정을 얼마나 부정적으로 소비하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가혹한 잣대는 텔레비전 밖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어쩌면 세상은 우리에게도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고 살기를 요구하는 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쳐다봤을 때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둥글고 싹싹한 표정. 그 보이지 않는 기준선에 맞추지 않으면 금세 슬롯성이 부족하거나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만다.
결국 나는 남들이 불편해할까 봐, 혹은 나에게 쏟아지는 불필요한 오해와 참견을 차단하기 위해 ‘가짜 미소’라는 방어막을 하루 종일 치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폭력적인 일이다. 내 기분이 좋을 때 웃고, 피곤할 때 무표정할 수 있는 것은 내 감정의 고유한 권리다.
스마트폰 배터리도 방전이 되면 충전할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왜 사람의 얼굴은 방전된 상태로 가만히 두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걸까. 내가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단지 웃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변명을 하고 억텐(억지 텐션)을 끌어올려야 할 의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남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태어난 감정의 서비스직이 아니다. 멍하니 허공을 보는 얼굴, 일에 집중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얼굴, 에너지가 고갈되어 멍 때리는 얼굴 모두 타인에게 검열받거나 허락받을 필요가 없는 내 소중한 일상의 표정들이다.
앞으로 또 누군가 내 무표정을 보며 “화났어?”라고 묻는다면 나는 더 이상 당황하며 억지웃음을 짓지 않을 생각이다. 굳이 목소리 톤을 높여가며 변명할 에너지도 아깝다. 그저 눈에 힘을 푼 편안한 표정 그대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요, 화 안 났습니다. 그냥 가만있을 뿐이에요.”
내 무표정을 오해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그 오해를 억지웃음으로 갚아줄 의무는 내게 없다. 무표정 역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표정이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웃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마음이 바닥까지 무너져 내린 순간에도 얼마든지 웃을 수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고통을 들키고 싶지 않아 평소처럼 행동하고, 누군가는 주변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기꺼이 둥글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우울하고 괴롭다고 해서 얼굴에 반드시 우울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람의 표정만 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 한다. 활짝 웃는다고 괜찮은 것도 아니고 무표정하다고 불친절한 것도 아니다. 웃음의 모양보다 중요한 것은 그 웃음 뒤에 무엇이 있느냐다.
내가 이 바카라에서 지우고 싶은 것도 웃음 자체가 아니다. 웃어서는 안 되는 순간에 웃는 것, 웃고 싶지 않은데도 나를 숨기기 위해 웃는 것, 내 감정을 지워가면서까지 타인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웃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