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 모두가 공유하는 유선 전화기가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시절이었다. 따르릉 울리는 벨 소리에 무심코 수화기를 들었다가 피곤한 상황에 휘말리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날이 딱 그랬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척이었다.
가벼운 안부로 시작된 통화는 금세 선을 넘었다. 그는 마치 취조실의 형사라도 된 양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심지어 한 달에 얼마를 버는지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어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순진한 생각에 묻는 말마다 성실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 융통성 없는 솔직함은 곧장 나를 찌르는 무기가 되어 돌아왔다.
"네가 그렇게 살면 돼? 부모한테 잘해야지, 왜 그것밖에 못 하냐."
내 알량한 벌이와 처지를 제멋대로 재단하는 그 오만한 목소리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오랜만에 전화해서 남의 귀한 자식한테 무슨 헛소리야.'
속으로는 펄펄 끓는 분노가 치솟았지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전혀 달랐다.
"허허, 그러게요."
비겁하게도 나는 화를 내는 대신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섞어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친척의 무례함에 정면으로 맞서기엔 나 스스로도 처지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자격지심이 있었고, 무엇보다 집안 어른과 얼굴을 붉히는 '버릇없는 조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등을 피하는 것이 웃어른에 대한 미덕이라고 체화된 오래된 방어기제가 자동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셈이다.
전화를 끊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엄마가 내 굳은 표정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뭔데?"
그 한마디에 당신 자식이 방금 얼마나 무시당했는지 고자질하고 싶어 목 끝까지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차마 입 밖으로 그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갈등을 회피하는 사람은 단순히 갈등 자체가 싫어서만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눈앞의 불편함보다 관계가 깨질 가능성이나 그로 인한 파장을 훨씬 더 크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친척의 무례함보다 내가 사실을 털어놓는 순간 나를 대신해 불같이 화를 낼 엄마와 그 친척 사이에 벌어질 껄끄러운 다툼이 훨씬 더 두려웠다. 명절마다 마주쳐야 할 피곤한 상황과 뒷말들. 그 모든 소란의 원흉이 되는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나는 결국 내 감정을 삼켜버리는 쪽을 택했다.
진짜 지켜야 할 것은 껍데기뿐인 가정의 평화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존엄이었는데.
나는 평화라는 이름의 분위기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나 자신을 지워버리는 뼈아픈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차라리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딱 잘라 말했어야 했다. 내 영역을 침범하는 무례한 발이 들어왔을 때 단호하게 문을 닫아걸었어야 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친척이었지만, 그 일을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건 나였다. 어설픈 미소와 침묵으로 억지로 삼켜버린 감정은 결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화되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딱딱하게 굳어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마다 욱신거리는 흉터가 되었다.
누군가 내 존엄을 함부로 짓밟는 순간까지 참고 웃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자기 포기였다.
나는 갈등을 피한 것이 아니었다. 갈등이 남긴 상처를 혼자 감당했을 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분위기를 지켰지만 끝내 나 자신은 지키지 못했다. 갈등을 피하고 나면 결국 내가 그 감정을 다시 감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