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한강ㅡ 낭만역입니다.
퇴근 시각은 6시였다.
박성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면서 가방을 고쳐 맸다.
지하철을 탔다. 2호선. 잠실역 방향.
소희는 그제야 알아챘다.
아, 이 사람은 지금부터가 진짜 하루구나.
— 잠실한강공원ㅡ
잠실역에서 내리자 공기가 달랐다. 강바람이 살짝 섞여 있었다.
박성우는 한강공원 방향으로 걸었다.
무척 익숙한 걸음이었다. 몇 번을 걸었는지 모를 길.
공원 한쪽 구석, 나무 밑 평평한 바닥.
박성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기타였다.
접이식이 아닌, 오래된 통기타. 나무 색이 바래고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었다. 케이스 안쪽에 스티커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오래된 것들이었다. 어떤 건 반쯤 벗겨져 있었다. 누군가 선물로 붙여줬을 것 같은, 그런 스티커들.
소희는 기타를 꺼내 들었다. 손이 알아서 움직였다.
줄을 하나씩 튕겨보고, 귀로 듣고, 조율하고. 서두르지 않았다. 오래된 습관의 손놀림이었다.
이 시간도 이미 하루의 일부였다.
첫 음이 울렸다.
아 ㅡ.
소희는 잠깐 멈췄다.
한강이었다. 저녁 여섯 시가 넘은 한강.
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둡지 않아서 남색과 주황이 섞인 채로 강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강물은 그 색을 비추며 잔잔하게 흔들렸다.
멀리 다리 위로 자동차 불빛이 줄지어 있었고,
강바람은 머리카락을 흩뜨릴 만큼 세지 않게 불었다.
딱 지금 같은 저녁에 맞는 바람이었다.
두 번째 음, 세 번째 음.
손이 멈추지 않았다. 소희도 멈추지 않았다. 몸이 기억하는 곡이 흘러나왔다. 오래된 노래였다. 소희는 제목을 몰랐지만, 이 몸은 알았다.
수백 번, 어쩌면 수천 번 쳐온 곡. 손가락이 줄 위를 짚는 위치가 눈 감고도 나왔다.
멜로디가 퍼지기 시작했다.
조깅하던 남자가 속도를 늦추다가 완전히 멈춰 섰다.
이어폰을 한쪽 빼고 들었다.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서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다시 뛰었다.
유모차를 밀던 젊은 엄마가 아이 손을 잡은 채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아이가 기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아이 어깨를 감싸고 잠깐 같이 서서 들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곡이 한 소절 더 흐르고 나서야 엄마가 아이 손을 살짝 이끌어 걸음을 뗐다.
그게 전부였다.
박수도 없었다. 동전을 던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잠깐 멈추고, 듣고, 가는 사람들.
근데 그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게 좋았다. 이건 보여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냥 치는 거였다. 오늘 하루치의 무게를 여기서 내려놓는 것.
두 번째 곡이 시작됐다.
소희는 연주하면서 이상한 걸 느꼈다.
가슴 어딘가가 조금씩 차오르는 감각. 슬픈 것도 아니고, 신나는 것도 아니었다.
뭐라고 이름 붙이기가 애매한 온도였다. 굳이 말하자면 꽉 찬 느낌?
노을 지는 한강 앞에서, 보는 이들도 거의 없이 그냥 기타를 치고 있는데 마음은 평온한 이 느낌...
이게 행복인가.
소희는 그 감각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이름 붙이면 달아날 것 같아서.
그냥 계속 쳤다.
강물이 흘렀다. 조명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다리 위 불빛이 강 위에 길게 늘어졌다.
어디선가 치킨 냄새가 솔솔 풍겼고,
멀리서 아이들이 깔깔대는 소리도 들렸다.
한강을 가득 채우는 다양한 감각들
강바람이 적당히 시원했다.
그렇게 세상이 그냥 흘러가고 있었다.
박성우는 그 안에서 쉬지 않고 기타를 쳤다. 소희도 그 안에 있었다.
세 번째 곡이 끝났을 때, 박수 소리가 들렸다.
돌아봤다. 벤치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였다.
언제부터 앉아 있었는지 몰랐다. 흰머리에 점퍼 차림.
박수를 두 번, 세 번 쳤다. 많지 않았다. 근데 진심이었다.
박성우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할아버지가 웃었다. 그것뿐이었다.
소희는 그 웃음을 보면서 생각했다.
낮에 설렁탕 먹으면서도 가방을 옆에 두고 기다리던 것,
퇴근 후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발걸음이 살짝 빨라졌던 것,
전부다 이 순간을 위한 거였구나.
이 사람은 매일 기타를 들고 출근했다.
아무도 모르게.
매일 양복 옆에 낡은 기타를 들고, 낮엔 견적서를 검토하고, 저녁엔 여기 와서.
그게 이 사람의 숨구멍이었다.
소희는 다시 줄을 짚었다. 네 번째 곡.
이번엔 소희가 고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성우의 기억 속 곡인데, 소희가 치고 싶었다.
강바람이 또 한 번 불었다.
[오늘의 체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원래의 몸으로 귀환합니다.]
2호선. 신도림 방향.
소희는 봉을 잡고 서 있었다. 손끝에 기타 줄의 감촉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시원한 그 바람의 감각도, 노을 지는 한강의 모습도.
지하철 안을 둘러봤다. 퇴근길 사람들. 저마다 폰을 보거나 눈을 감거나 창밖을 보거나.
소희는 생각했다.
저 사람들 중에 지금 퇴근하는 게 아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짜 하루가 퇴근 후에 시작되는 사람.
가방 안에 남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것을 넣고 다니는 사람.
자신만의 쉼을 찾아가는 사람.
소희는 메모장을 열었다.
강진우. 서아영. 현우엄마. 박성우.
이름을 추가로 적 고는 폰을 껐다.
전동차가 신도림역으로 미끄러졌다.
소희는 내리면서 문득 생각했다.
나의 숨구멍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