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출발 8일 전 2

떠나기 전에

by장호현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성공적이었고 떳떳하다고 자부해도 좋을 만큼 치열하게 살아냈다. 덕분에 아이들은 무사히 성년으로 자라났고, 가정에 큰 풍파 없이 단단하게 안착했다.


정년퇴직을 하던 날, 퇴임식장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아 있던 아내와 딸, 그리고 의젓해진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잘 살아왔다고. 적어도 내게 주어진 바카라임만큼은 끝까지 비겁하지 않게 도맡아 해냈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모든 성취와 시간의 뒤편에서, 오래된 질문 하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퇴직 후 맞이한 어느 낯선 아침이었다.


영호는 습관처럼 새벽 여섯 시 삼십 분에 번쩍 눈을 떠버렸다. 더 이상 출근할 이유도, 서둘러 넥타이를 고를 필요도 없는데 몸은 여전히 수십 년간 길들여진 시간에 맞춰 반응하고 있었다. 알람도 울리지 않는 적막한 새벽이었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홀로 앉아 창밖의 푸르스름한 동트기를 바라보았다. 출근할 곳도, 급히 확인해야 할 해외 메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목적지를 잃은 조난자처럼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답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가족이라는 거대한 그늘 뒤에 숨어 차마 인정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대신 그는 테너 색소폰을 배웠고, 서툰 손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했으며, 먹을 갈아 수묵화를 따라 그렸다. 복싱 체육관에서 글러브도 손에 꼈다. 언젠가 은퇴하면 꼭 해 보겠다고 마음속 깊은 곳에 미뤄 두었던 일들을 하나씩 꺼내어 쥐었다.


색소폰 학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혹은 홀로 맞는 점심시간이면 그는 늘 혼자였다. 반짝이는 악기 가방을 옆자리에 세워 두고 허름한 국밥집 창가에 앉아 있으면 이상할 만큼 마음이 가라앉았다. 펄펄 끓는 뚝배기에서 김이 오르고, 창밖으로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의무로부터 유예된 기분이 들었다. 얼음이 사각거리는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이 그 곁을 지킬 때면 해방감은 더욱 짙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밖을 떠돌다 집으로 돌아와 불 꺼진 서재 문을 열 때면, 어김없이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그림자처럼 따라 들어오곤 했다.


적어도 대부분의 날들은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허전함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삶의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거대한 갈증으로 변해 갔다.


부족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이루어 놓은 뒤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인생의 거대한 빈자리 같은 것이었다.


그 빈자리는 결국 ‘여행’이라는 둥글고도 거친 단어로 모습을 드러냈다.


돌아보면, 과거 출장을 떠나던 날들의 기억은 늘 지독하게 판박이 같았다. 인천공항을 떠나 낯선 대륙의 공항에 내리고,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때로는 김해공항이 출발지이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이른 시각부터 고객사를 방문해 날 선 회의를 이어갔다. 회의가 끝나면 밤새워 보고서를 정리했고, 다시 짐을 꾸려 다음 도시의 공항으로 향했다. 택시 차창 밖으로 세계적인 명소가 스쳐 지나가도 그곳을 걸어볼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여권의 페이지마다 수많은 입국 도장과 비자가 겹겹이 찍혀 있었지만, 정작 그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각국의 건조한 회의실 풍경과 숨 가쁘게 돌아가는 프로젝트 일정표뿐이었다. 낯선 도시의 공기를 마시면서도 늘 다음 비행기의 시간을 셈해야 했던 날들.


그래서 이번 여행만큼은 온전히 달라야 했다.


어디를 꼭 찍어야 한다는 의무적인 목적지도, 누구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강박도 없는 시간. 이름 모를 골목길을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마음에 드는 허름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광장의 벤치에 앉아 지나치는 사람들의 풍경을 한없이 눈에 담는 것. 어느 날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바다만 바라보며 하루라는 시간을 고요히 흘려보내는 그런 시간 말이다.


가장 바란 것은 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 언제 이곳을 떠나 다음 목적지로 향해야 할지, 그 흔한 일정표조차 들춰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머물고 또 머물다. 그러다 그 도시에 스며든 온기가 희미해질 때쯤, 비로소 새로운 목적지를 어렴풋이 떠올리고 발걸음을 옮길 준비를 하는 것.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머무는 시간의 길이를 미리 정해두는 일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 없었다.


그렇다고 삶의 나침반을 완전히 놓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대륙과 대륙을 건너는 굵직한 선, 오래전부터 영혼의 지도 한쪽에 깊이 뿌리내려 마음속에 조용히 정착해 있는 단 하나의 이정표는 언제나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속도에 떠밀리지 않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길.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모하게 흘러가면서도 대체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느슨한 결심이야말로 평생을 바쁘게 달려온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다정한 허락이자, 진정으로 꿈꿔 왔던 단 하나의 완벽한 여행이라는 것을.


영호는 남은 생의 한 페이지쯤은 온전히 그런 시간으로 채워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아득한 망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구체적인 계획이 되었고, 계획은 어느새 실체적인 출발 날짜를 가진 묵직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로 여드레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때, 거실 한쪽에 던져두었던 휴대전화가 날카롭게 울렸다. 깊은 사색에서 깨어난 듯 무심하게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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