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에

프롤로그: 여권

by장호현

오래된 서랍의 맨 밑바닥. 그 어둡고 깊은 퇴적층 속에서 그것은 수년 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영호는 빛바랜 보험증권들과 해묵은 다이어리 사이에서 그것을 꺼내 들었다. 다니던 회사의 로고가 선명한 가죽 여권 케이스. 짙은 표지는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은 것처럼 낡아 있었고, 모서리는 닳아 하얗게 보풀이 일어 있었다.


빛바래고 묵직해진 커버를 넘기자, 한때 치열하게 부딪혔던 지난 계절들의 기록이 흩날리듯 펼쳐졌다. 더 이상 출근하지 않는 이름이 번듯하게 박힌 가죽은 여전히 빳빳했으나, 그 속에 품었던 시간은 이미 아득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손끝으로 표지를 쓸어내리자, 알 수 없는 아득한 냄새가 훅 다가왔다. 그 냄새는 이상하게도 물리적인 거리와 시간을 가볍게 뛰어넘어, 오래전에 닫아걸었던 기억의 문을 불쑥 열어젖혔다.


먼지 쌓인 서랍의 밑바닥, 그 깊은 어둠 속에서 그것을 끌어올린 손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거실 소파에 주저앉아 여권을 펼치자, 누렇게 바랜 종이 페이지마다 겹겹이 찍힌 수많은 출입국 도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싱가포르의 타원형 도장, 프랑스의 사각 스탬프, 독일과 네덜란드, 아랍에미리트와 영국, 그리고 태평양을 건너던 날들의 미국 입국 심사 필증까지.


한때 영호는 그것을 보며 묘한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지구의 경계선을 물 마시듯 넘나들며, 누구보다 넓은 세상을 보았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마음 한구석은 묘하게 허전해졌다. 도장은 놀라울 정도로 빽빽했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공항의 매캐한 대기실, 회색빛 콘크리트 외벽, 철골 뼈대만 앙상한 천장, 새벽녘의 차가운 호텔 로비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밀폐된 회의실의 공기는 뼈저리게 기억났다. 하지만 정작 그 도시의 진짜 풍경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거리에서 풍기던 빵 굽는 냄새도, 골목 모퉁이에 피어 있던 이름 모를 꽃의 색깔도, 그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아침 출근길을 시작하던 표정도 영호는 알지 못했다.


문득 뼈저린 깨달음이 밀려왔다.


“나는 세상을 다닌 것이 아니라, 일을 다녔구나.”


출장은 여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자본과 조직의 톱니바퀴에 몸을 끼워 넣은 채 정해진 궤도를 맹목적으로 질주하던 노동의 한 부분이고 연장이었을 뿐이다. 그 진실을 온몸으로 이해하는 데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여권을 덮으려다, 문득 종잇장 사이로 삐져나온 얇은 비닐 코팅 모서리를 발견했다. 이끌리듯 당겨보니 그곳에는 오래된 가족사진 한 장이 얌전히 끼워져 있었다.


해맑게 웃는 초등학생 아들 민수, 두 손으로 V를 그리며 장난치는 유치원생 딸 민지, 눈부신 청춘의 아내 이주은, 그리고 검은 머리에 주름 하나 없는 마흔 중반의 강영호.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세상이 무너져라 웃고 있던 네 사람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눈부신 시간이 이토록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갈 줄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영호 자신 역시 굽이굽이 길을 돌아 마침내 ‘예순다섯’이라는 낯선 숫자의 언덕에 덜컥 올라서게 될 줄은.


평생을 악착같이 살았다. 가족의 안위가 곧 내 삶의 전부라 믿으며,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비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단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후회는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런데 정년의 문을 통과하고 모든 짐을 내려놓은 그 순간, 마음속 가장 깊은 심연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


누군가의 자식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그리고 상사로 살아오며 정작 내 안의 진짜 ‘영호’는 무엇을 갈망하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비로소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인생의 주도권을 쥐어보지 못할 것 같다는 서늘한 직감 때문에. 한번 한 결심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권을 다시 펼치자, 지나간 수많은 도장들 사이로 아직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빈 페이지가 몇 장 묵묵히 남아 있었다.


거실에 남은 은은한 노을 속에서, 영호는 그 빈 여백을 하염없이 응시하며 길고 깊은숨을 토해냈다. 그동안 무언가를 반드시 증명해 내야 한다는 무거운 강박에 쫓겨 스스로를 거칠게 채찍질하던 날들은 퇴직의 문턱을 넘으며 이 저녁처럼 완전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얗게 비어 있는 종이 면 위로, 앞으로 마주하게 될 이름 모를 바람과 낯선 풍경들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남은 날들은 치열한 목적지 없이, 문득 바람이 머무는 푸른 바닷가에 가만히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려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맡거나, 손끝이 시린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입술에 대며 오롯이 내 안의 느린 숨소리에 귀 기울이는 여정이어야 했다.


그것은 타인의 기대와 세상의 짐을 모두 내려놓은 황혼의 언덕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서툴지만 눈부신 첫걸음이었다.


창밖으로 늦가을의 서늘한 저녁노을이 짙어지고 있었다.


영호는 여권을 조용히 덮었다. 손바닥만 한 이 낡은 여권이, 그리고 여드레 뒤에 마주하게 될 그 먼 길의 유랑이,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지나온 날들의 상처를 보듬고 남은 생애의 나침반을 바로 세우게 만들 진짜 ‘출발’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의 그는 아직 아득하게 감싸인 채로 예감하고 있었다.


서랍 닫히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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