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출발 8일 전 3

떠나기 전에

by장호현

수화기를 집어 들고 귀에 갖다 대었다.


“어.”


“아버지.”


익숙하고도 단단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음의 높낮이가 평소와 달랐다. 수화기 너머로 바깥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얕고 무거운 한숨 소리가 전해져 왔다. 평소라면 “아버지, 저예요” 하고 툭 던지듯 밝게 전화를 했을 녀석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어딘데?”


“집에 계세요?”


“그럼, 있지. 방금 들어왔어.”


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만 가쁘게 오갔다. 그는 본능적으로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용건을 단숨에 털어놓았을 녀석이었다.


“무슨 일인데 목소리가 그러냐?”


아들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의 머뭇거림 끝에 뱉어진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는 애써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말해. 지금 말해도 돼.”


하지만 아들은 함께 웃어주지 않았다.


“전화로는 안 돼요. 직접 뵙고 말씀드릴게요.”


그 짧은 한마디 속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예감의 파문이 일었다.


“지금 집으로 오는 길이야?”


“네. 한 시간쯤 뒤에 도착할 것 같아요. 경주를 지나고 있어요.”


“그래, 알았다. 조심히 와라.”


통화는 짧고 건조하게 끊어졌다.


그는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잠시 동안 거실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다.


주방 쪽에서 다가오던 아내가 물었다.


“아들 같은데, 무슨 일 있대요?”


“모르겠어. 갑자기 집에 온다네.”


“뭐야, 왜 갑자기 말도 안 하고 온대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아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앞치마에 물기를 툭툭 털어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느덧 서른의 나이에 접어든 아들은 여전히 도서관과 연구실의 냄새를 묻히며 공부를 이어가고 있었다. 대학원 박사 과정 2년 차.


돌아보면 아들은 늘 그런 아이였다. 큰 말썽 한 번 부리지 않고, 부모 마음 무너지게 할 걱정조차 끼치지 않은 채, 묵묵히 제 앞걸음을 내디디며 단단하게 자라 준 착한 아들. 나름대로 먼 장래의 지도까지 품에 안고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년이었다.


다만 가끔씩이 문제였다. 아직 가보지도 않은 먼 미래의 불안과 답답함을 미리 끌어와, 이 세상 모든 고민을 혼자서 껴안은 것처럼 괴로워하곤 하는 여린 구석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향한 열정 뒤에는 남다른 바카라임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루빨리 좋은 자리를 찾아 제 손으로 돈을 벌고, 단단하고 견실한 일상을 꾸리고 싶어 하는 요즘 청년들답지 않은 묵직한 속내를 품은 아이였다.


그는 그 마음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이번 일 역시 젊은 날의 수많은 고민 중 하나이려니 치부하려 했다. 대단한 일이 아닐 것이라, 아니 대단하지 않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들이 집에 도착하기만을, 그 익숙한 발소리가 현관문을 두드리기를 기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다가올 파고를 예상하지 못한 채 애써 마음의 평정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라는 그 짧고 묵직한 문장이 귓가에 둥둥 떠다니며 가라앉지 않았다.


어둠의 푸른빛이 조금씩 거실 창문에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현관문 쪽에서 익숙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띵동—.


주방에서 일하던 아내가 먼저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영호는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관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몇 걸음 사이, 이상하게도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관 센서등이 화사하게 켜졌다. 아내가 문을 열며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어이구, 우리 아들… 어?”


아내의 목소리가 중간에 뚝 끊겼다. 영호가 거실을 돌아 현관 쪽으로 다가갔을 때, 아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들의 굳고 창백한 얼굴 뒤로, 처음 보는 짙은 감색 숄을 두른 가녀린 어깨가 보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꼿꼿하던 아들의 넓은 등 뒤로, 낯선 여자의 그림자가 조용하고도 무겁게 겹쳐지고 있었다.


젊은 여자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가늠할 수 없었고, 아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비장하고도 두려운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영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오늘 이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의 시간과, 이 문을 연 이후의 시간은 완전히 결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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