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출발 8일 전 1

떠나기 전에

by장호현

출발을 여드레 앞둔 토요일 오후였다.


안방 화장실로 들어가는 드레스룸 앞에는 펼쳐 놓은 캐리어가 있었다. 아직 채워진 것이 거의 없어 빈 캐리어나 다름없었다. 그 옆에는 제법 크기가 있는 검은 백팩도 속이 텅 빈 채 놓여 있었다. 주변에는 속옷과 양말을 넣은 투명한 이너백이 나뒹굴고 있었고, 신발주머니 안에는 흰 운동화 한 켤레가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경량 패딩과 누비바지도 한쪽에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다.


영호는 한참 전부터 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이 짐을 다 싸는 순간, 정말로 이 집을 떠나야만 하고, 그 뒤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밀려 나갈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조금 전에도 셔츠 몇 벌을 개켜 캐리어 옆에 챙겨 두었고, 세면도구와 상비약, 그리고 매일 저녁 식사 후 먹어야 하는 당뇨약을 다시 확인했다. 여권과 항공권이 들어 있는 가죽 파우치를 쓸어내리던 손끝에 굳은살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몇 번이나 열어 보았던 파우치였지만 손길은 자꾸만 머뭇거렸다. 준비만 놓고 보면 더 이상 손댈 것이 없었다. 이제는 차곡차곡 넣기만 하면 될 듯했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빠뜨린 사람처럼 자꾸만 캐리어 주변을 맴돌았다.


안방으로 들어오던 아내가 한마디 했다.


“아, 좀 대충 하세요.”


그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미리미리 챙겨 둬야지.”


“내일 당장 가는 것도 아니고 아직 며칠이나 남았잖아요.”


“그래도 미리 해 두어야 마음이 편하지.”


아내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웃었다.


“아침부터 그 앞에서만 몇 시간을 보는지 알아요?”


그도 따라 웃었지만 손은 여전히 캐리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가을의 건조한 햇살이 아파트 이중창 사이로 길게 기울고 있었다. 물을 많이 타서 커피인지 물인지 구분이 모호한 한 잔의 아이스커피를 들고 식탁에 앉아 남산과 그 너머 문수산, 그리고 더 멀리 1,000미터가 넘는 고봉이 즐비한 영남 알프스의 능선을 보고 있노라니 평범하면서도 느슨한 일상이 새삼 다가와 있음을 몸으로 느꼈다.


눈을 아래로 돌려보면 강 옆 산바카라길을 느긋하게 걷는 이와, 뛰는 건지 걷는 건지 모호한 수많은 사람들, 그 옆을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는 이들이 수없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왠지 따뜻하게 손을 잡고 운동 삼아 걸음을 옮기는 부부도 보였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초저녁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평범한 장면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어쩌면 떠남이라는 것은, 떠나는 행위 그 자체보다 결국 남겨 두고 가는 것들을 하나씩 눈에 담아두는 일인지도 몰랐다.


영호는 천천히 소파에 기대어 앉아 거실 벽에 걸린 세계지도를 바라보았다.


몇 년 전 여행 잡지 부록으로 얻어 액자에 넣어 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인테리어 소품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표가 되어 있었다. 지도 위에는 붉은 펜으로 그어 놓은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튀르키예.
아테네.
크레타섬.
몰타.
유럽의 여러 도시를 거쳐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모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남미.


마지막 선은 유난히 길고 아득했다.


그 선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씁쓸하면서도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촘촘한 계획과 바카라임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결국 마지막에 스스로를 위해 떠나는 길마저 이렇게 치밀하게 계획을 품고 떠나려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늘 준비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번 여행만큼은 그 어떤 계획에도 매이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건만, 결국 또 이렇게 짐 앞에서 같은 물건을 몇 번씩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서른이 되기 전에는 월급날이면 가장 먼저 부모님 생각을 했다. 두툼한 봉투를 건네던 그날 아스라이 번지던 어머니의 미소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늦은 결혼이었지만 결혼 후에는 새로운 가족이 삶의 중심이 되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주말에도 회사 전화를 끊지 못했고, 낯선 출장지 호텔 방의 침대에 누우면 잠들기 전 꼭 집으로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확인했다.


서른다섯에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을 떠나 외국계 기술회사로 옮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 넓은 세상에서 글로벌한 무대에서 일하고 싶다는 야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언제나 가족이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더 나은 집, 더 넉넉한 생활, 그리고 미래의 아내와 태어날 아이들의 흔들리지 않는 앞날을 위해 든든한 뒷배가 되고자 했었다. 힘들게 살아오면서 느낀 어려움을 내 가족에게는 부족함 없이 채워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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