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혁명의 파토스, 어떤 학자의 침묵
여기에 한 저명한 철학자가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좌장, 아도르노의 68혁명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당시 비판이론가들과 견해 차이로 대립하던 신좌파 세력에게 노년의 보수화나 겁먹은 부르주아 지식인의 후퇴로 조롱받았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의 사유가 배신당한 지점이 아니라, 그 사유가 가장 일관되게 관철된 지점이었다.
1969년 1월 슬롯연구소를 점거한 학생들에게 경찰을 부른 일, 그해 4월 강의실에서 여학생들이 가슴을 드러내고 꽃잎을 뿌리며 그를 조롱한 이른바 '가슴 시위(Busenaktion)', 그리고 몇 달 뒤의 심장마비와 아도르노, 그의 죽음. 이 비극적 장면들은 단순한 발화가 아닌 그의 철학 전반을 관통하는 그의 테제 그 자체를 상징한다.
학생들이 아도르노에게 던진 핵심 비난은 "당신은 해석만 할 뿐 행동하지 않는다"였다. 아도르노는 이론과 실천의 즉각적 합일이라는 요구 자체를 의심했다. 그가 <이론과 실천에 관한 방주>(1969)와 <체념(Resignation)>에서 겨냥한 것은 '행동주의(Aktionismus)', 곧 구조를 바꾸지 못한 채 불안만 해소하는 강박적 유사활동(Pseudo-Aktivität)이었다. 지금 당장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은 그에게 관리된 세계(verwaltete Welt)의 증상이지 그 극복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체념'이라는 비난을 뒤집는다. 사유를 멈추지 않고 유사활동에 흡수되기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저항이라는 것이다. 사유하는 자는 유사행위에 저항한다. 여기서 사유는 도피가 아니라 실천의 한 양식으로 재정의된다.
<계몽의 변증법> 이래 아도르노의 진단은 이러하다. 프롤레타리아는 문화산업과 후기자본주의에 통합되고 흡수되었으며, 혁명의 주체적, 객관적 조건은 소멸했다는 것이다. 의식 자체가 관리되는 상황에서 감행되는 혁명은 지배를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하거나, 더 나쁘게는 반동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1918-19년 독일혁명의 실패와 뒤이은 나치즘을 몸으로 겪은 유대인 망명자인 아도르노에게, 그 당시 좌파의 행동주의가 파시즘적 역풍을 부를 수 있다는 공포는 추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론적 모델이 화염병으로 실현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는 소심함이 아니라 대중동원과 정치의 미학화, 의례화에 대한 구조적 경계심이었다.
68혁명에 대한 그의 거부는 <부정변증법> (1966)의 핵심이었다. 아도르노 후기 철학 전체는 특수자를 개념에, 개별자를 총체성에 강제로 포섭하는 '동일성 사유(Identitätsdenken)'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런데 개인을 당과 운동 그리고 대의에 종속시키고 연대를 강제하며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혁명적 실천의 논리야말로 정치적으로 번역된 동일성 사유다. 농성의 집단적 강제, 헌신에 대한 압박, 인물숭배와 관례화된 급진성 속에서 그는 <권위주의적 성격>(1950) 에서 분석했던 바로 그 권위주의의 구조적 메아리를 감지했다. 비동일자와 고통받는 개별자를 옹호하는 그의 급진주의가,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라는 운동의 논리에 저항하게 만든 것이다. 그의 후퇴는 급진주의의 포기가 아니라 그 반전체주의적 핵심의 관철이었다.
아도르노는 유토피아의 계기가 오직 부정 속에서만 살아남는다고 보았다. 거부, 규정적 부정, 그리고 자율적 예술(<미학 이론>) 속에서만 말이다. 거짓된 총체성 안에서 화해된 상태를 긍정적으로 그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왜곡된다. 그가 유대 신학의 우상금지를 세속화해 붙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생들이 원한 것은 긍정적 강령과 청사진, 가시적 성과였다. 그러나 아도르노에게 성급한 긍정성은 유토피아에 대한 배반이었다.
마치 체게바라의 선례처럼 저항 자체가 하나의 해프닝으로 상품화되고 소비될 위험, 곧 문화산업이 반란마저 흡수하는 사태 역시 그의 눈에 선했다.
다만 이 재구성을 그의 편에서만 읽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루카치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두고 심연을 안락하게 내려다보는 '그랜드 호텔 아비스(Grand Hotel Abgrund)'라 조롱했듯, 아도르노의 부정성이 결국 미학화된 정관주의(quietism)이자 엘리트주의로 귀착한다는 비판은 만만치 않다. 경찰을 부른 행위는 아무리 철학적으로 정당화해도 정치적 실패로 보여진다는 성격을 완전히 지우기 어렵다.
마르쿠제가 학생들에게 더 공감하며 아도르노와 서신으로 대립한 사실을 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68혁명이 마르쿠제의 마르크스-리비도(프로이트)적 신좌파 방법론에서 나왔으므로 이는 당연할 것이다. 그의 방법론은 사실상 이미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벗어난 독자적 이론 구조였으며, 68이전 미국으로 본거지를 옮긴 이후부터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와 한 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내부를 보기로 했다.
하버마스(프랑크푸르트학파 2세대)가 이미 1962년 <공론장의 구조변동> 이후 부터 총체적 부정 대신 소통적 합리성이라는 규범적 기반을 재건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사실은 이 지점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 내부 균열과 세대 전환을 보여준다. 총체를 부정만 하는 이론은 실제 정치의 발판을 남기지 않는다는 반론이다.
요컨대 68에 대한 아도르노의 침묵과 거리두기는 그의 사상을 반박하는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관리된 세계, 비동일성, 규정적 부정, 형상금지, 사유로서의 저항이라는 그의 핵심 개념들이 정치적 국면에서 필연적으로 취하게 되는 형태였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그 일관성이 그의 사유의 한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실천(Praxis)으로 이행할 다리의 부재라는 한계. 하지만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실천이란, 다의적이며 왜곡되기 마련이란 것도 우리는 상기해야할 것이다.
아도르노의 '관리된 세계'는 이음매 없는 총체적 지배라서, 저항은 오직 전체에 대한 부정으로만 남고 실천의 발판이 없다. 그래서 정관주의로 귀착. 푸코는 바로 이 총체화를 거부한다. 권력은 억압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생산적이고, 모세혈관처럼 분산되어 있다. 고로 모든 공간에 슬롯의 권력(통치권력과 규율권력)은 연역되어 있으며, 모든 공간에 권력이 있기에 그 모든 공간엔 저항이 있다는 것. 권력을 이렇게 흩어놓는 순간, 총체적 혁명이나 역사철학 없이도 무수한 국지적 지점에서 투쟁이 가능해진다. 이게 아도르노의 교착에 대한 푸코식 해답이다. '보편적 지식인'(인류의 양심으로서 이론에서 발언하는 자, 곧 아도르노가 점한 자리) 대신 감옥과 병원 같은 특정 현장에서 국지적 지식으로 싸우는 '특수적 지식인'. 71년 푸코의 감옥정보그룹 활동은 "당신은 해석만 했을 뿐"이라는 지식인 비판에 대한 푸코의 실천적 응답이었던 셈이다.
무엇이 푸코의 행동하는 지식인인가? 지식인은 보편적 당사자를 대신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지식인은 필히 거대담론을 형성해 그 자체로 권력으로 변질해버리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한없이 특수해 져야한다. 억압받는 삶의 현장에서 그 현장 그 순간의 미시적 권력에의 억압을 당사자로 하여금 드러내게 산파해야한다는 것이다. 말이 되지 못한 말, 이윽고 그 당사자가 '직접' 그 현장에서 그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사실 여기서 더 날카로운 반전이 있다. '가슴 시위'처럼 성적 전복을 해방으로 내세우는 68의 그 흐름—마르쿠제식 에로스 해방, "금지를 금지하라"—이야말로 훗날 푸코가 '억압 가설'로 해체하는 바로 그 대상이라는 것이다. 억눌린 진짜 욕망과 진정한 자아가 있어 그것을 이성이 토대로 하고 있기에 그걸 풀어주었을 때 비로소 이성이 해방된다는 마르쿠제의 프로이트(리비도)—마르크스적인 그 도식 말이다. 푸코는 성이 권력의 바깥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가장 밀도 높은 이행 지점이라고 봤다. 그러니 아도르노를 조롱한 학생들의 그 전략은 푸코에게 해방이 아니라 성적 장치(dispositif) 안에서의 작동인 것이다. 이 축에서는 푸코가 아도르노보다 마르쿠제와 더 크게 충돌한다.
그런데 정작 아도르노가 붙들었던 마지막 보루인 비동일자, 고통받는 개별자, 부정 속에 남는 유토피아의 잔여를 푸코는 포기힌다. 해방시킬 진정한 주체 같은 건 없다는 철저한 반휴머니즘이었다.
이것이 푸코를 아도르노의 부정성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게 하지만, 대가가 있다. 그럼 당신은 어디에 서서 저항하느냐는 물음, 곧 하버마스가 은폐된 규범주의라 부른 그 규범적 발판의 부재이다. 아도르노에게 부정성이 정치의 다리를 남기지 않았다면, 푸코에겐 저항의 규범적 근거가 흔들린다는 비판이 따라붙는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내부의 균열이 푸코에게서 다른 형태로 반복되는 셈이다.
말년의 푸코는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뒤늦게 읽고, 더 일찍 알았다면 "쓸데없는 말을 여럿 안 했을 것"이라 후회했다. 계몽 이성, 합리화, 지배에 대한 비판이라는 공통 계보—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까지 거슬러 가는—를 인정한 것이다. 다만 그는 회복해야 할 '좋은 이성' 대 '나쁜 도구적 이성'이라는 변증법적 구도는 거부하고, 이성 자체를 심판하는 대신 권력의 무한히 복수적인 합리성들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