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티르너와 푸코: 내면화로부터의 도피
19세기 청년 헤겔학파의 이단아, 슈티르너와 프랑스 과학철학과 계보학으로 구조주의를 극복한 탈구조 철학자, 미셸 푸코 사이에는 100년의 시간이 존재한다.
참고로 프랑스 과학철학은 과학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있어 패러다임 간에 연속성을 부정하며 그 우연성에 초점을 맞추는 과학에 대한 접근이다. 여기서 푸코는 한발짝 더나아가 그러하게 패러다임이 된 정상과학들이 담론의 권력에 의해서 그러한 정상성이 규정되어짐을 역설한다.
역사적으로 겹친 적 없는 두 사람이지만, 이 둘은 기묘할 정도로 닮아있으면서도, 미묘하게 갈라진다. 이 가상 대면은 사실 21세기 학계에서 실제로 벌어진 논쟁이기도 하다(뒤에ㅅ 다룬다).
인간은 최근에 발명된 것이며, 곧 바닷가 모래 위 얼굴처럼 지워질 형상이다.
- 미셸 푸코, 《말과 사물》
가장 강한 공명은 반(反)휴머니즘이다. 슈티르너가 포이어바흐의 '유적 인간(Mensch)'을 또 하나의 유령(Spuk)이라 폭로한 것과,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인간'이란 개념에 대한 논의가 겨우 최근에야 발명된, 곧 바닷가 모래 위 얼굴처럼 지워질 형상이라 선언한 것은 거의 같은 몸짓이다. 둘 다 정의, 도덕, 영혼, 주체 같은 신성한 보편을 해체하는 유명론자이며, 그것들을 초역사적 본질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슈티르너의 '유령 사냥'과 푸코의 계보학은 표적이 겹친다. 특히 규율권력이 순종하는 신체를 제작한다는 푸코의 분석은, 개인(ego)에게 주체의 주조를 강요하는 제도에 대한 슈티르너의 혐오와 곧바로 통한다.
나에게 모든 것은 무(無)다.
-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의 소유》
슈티르너는 푸코의 개념 장치 전체를 새로운 유령 목록으로 의심할 것이다. 신, 인간, 국가를 지웠더니 이제 당신은 권력(pouvoir)과 담론이라는 익명의 유사주체가 모두를 관통해 군림한다며. 슈티르너에게 이것은 개인 위를 떠도는 또 하나의 성스러운 관념이자 새로운 정신(Geist)으로 보일 수 있다. 결정적 항의는 이것이다. 주체가 전적으로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면, 대체 누가 저항하며 무엇의 이름으로 저항하는가? 푸코는 개인을 권력의 효과로 용해시키고 '나의 것'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슈티르너라면 모든 구성물을 삼켜버리는 환원 불가능한 지점으로서 유일자(Einzige)를 고집할 것이다.
정확히 그 유일자, 자기를 소유하는 에고를 푸코는 형성되어진 증상으로 진단할 것이다. 슈티르너는 자신이 가장 급진적인 반권위주의자라 믿지만, 푸코가 보기엔 그가 떠받드는 자기소유적 개인이야말로 법과 규율적 권력체제가 형성한 형상이다.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주권적 자아라는, 가장 뿌리 깊은 예속 형태를 슈티르너는 해방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는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를 "변장한 부르주아 개인"이라 조롱했던 것과 겨냥이 같지만, 논거는 다르다. 마르크스는 계급적으로, 푸코는 주체의 역사적 구성이라는 각도로 본다는 것. 슈티르너의 힘(Macht) ―내 힘이 미치는 것이 내 것― 이라는 소유물로서의 권력관도, 권력을 소유물이 아니라 미시적 관계망으로 보는 푸코에겐 순진하게 비친다.
그런데 후기 푸코(자기 배려, 실존의 미학, 자기의 테크놀로지)에 오면 거리가 급격히 좁혀진다. 자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벼려내는 자기형성, '권력이 원하는 바대로 통치받지 않으려는 의지'로서의 자유는 슈티르너의 고유성(Eigenheit)과 운을 맞춘다. 그럼에도 차이가 있다면, 푸코는 그 자기제작이 역사적으로 주어진 기법들을 통해 이뤄진다고 보는 반면, 슈티르너는 어떤 기법에도 앞서는 '창조적 무(schöpferisches Nichts)'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 가상 대면을 실제로 연출한 사람이 사울 뉴먼(Saul Newman)이다. 그는 슈티르너를 포스트구조주의의 선구자로 재독해하면서, 슈티르너의 '텅 빈' 유일자가 푸코에게 결여된 것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즉 주체가 권력에 완전히 내재해 구성된다면 저항의 근거가 사라진다는 푸코의 난점에 대해, 슈티르너의 무근거한(본질 없는) 자아는 권력 바깥의 '출발점'인 본질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실재하는 저항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뉴먼의 구도에서 슈티르너는 푸코를 완성하는 동시에 교정한다.
포스트 아나키즘 프로젝트는
사울 뉴먼(Saul Newman, 런던대 정치이론 교수)이 20여 년에 걸쳐 발전시킨 하나의 프로젝트다. 앞서 말한 슈티르너로 푸코를 교정한다는 구도는 특정 논문 한 편이 아니라 이 저작군 전체의 논지다. 핵심 텍스트를 시기순으로 짚으면 다음과 같다.
From Bakunin to Lacan: Anti-Authoritarianism and the Dislocation of Power (Lexington, 2001). 뉴먼이 포스트아나키즘(postanarchism)이라는 틀을 본격적으로 세운 첫 저작이다. 여기서 그는 슈티르너를, 고전 아나키즘의 인간본질주의(자연적으로 선한 인간을 국가와 권력이 억압한다는 도식)를 이미 안에서부터 무너뜨린 포스트구조주의자의 아버지로 재독해한다.
'Postanarchism and Power' (Journal of Power, Vol. 3, No. 2, 2010, pp. 259–274). 초록의 요지는, 푸코를 활용해 고전 아나키즘 이론 내부의 긴장과 한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며, 권력의 작동은 고전 아나키즘이 인정한 것보다 더 복잡하고 구성적(constitutive)이고, 고전 아나키즘은 국가 주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권력의 편재성을 드러내는 이 통찰이 아나키즘의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전 아나키즘을 포스트아나키즘으로 수정하도록 요구한다고 본다. 앞서 말한 저항의 근거 문제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Max Stirner (Palgrave Macmillan, 2011). 재평가 프로젝트의 학술적 정점이며, 여기 실린 그의 서문과 논문이 유일자와 '창조적 무'를 저항의 자리로 읽는 핵심이다.
Postanarchism (Polity, 2015). 앞선 논의를 종합한 단행본이다. 여기서 그는 민주정치의 통상적 '자유(freedom)' 개념 대신 슈티르너적 '고유성(ownness)' 개념을 자율성의 중심에 놓는다. 앞서 Eigenheit(고유성)를 후기 푸코의 자기형성과 겹쳐 읽은 지점의 출처가 이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은, 푸코를 따라 뉴먼은 '권력은 전적으로 나쁘며 폐지될 수 있다'는 고전적 아나키즘에 귀속되는 관념에 도전한다. 이때 권력은 뚜렷한 중심이 없으며 모든 슬롯형태와 외관을 같이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의 역사적 우연성에만 근거한다고 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