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자유를 잃는 사람들

Freedom is not Liberty: 보이는 것은 무언가를 가린다.


1. 개요


오늘날의 노동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형식과 실질이 어떻게 벌어지는가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글에서 플랫폼 노동이라는 특수한 사례를 들고자 한다.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자신의 신체와 시간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 배달의 라이더, 새벽의 기사, 화면 속 지도를 따라 도시를 가로지르는 90만의 사람들. 그런데 법은 아직 이들을 노동자라 부르지 않는다. 근로계약이 없으므로 이들은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개인사업자, 즉 임의고용 상태이며,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고 스스로 수익을 바카라임지는 독립된 주체로 호명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실질에 있어 이들이 노동자라는 것을. 형식이 실질을 가리는 그 틈, 바로 그 벌어진 틈에서 어떤 힘이 조용히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 힘은 한 갈래로 흐르지 아니한다. 평점과 수락률이라는 지표가 한 사람의 수입과 계정의 생사를 결정하고, 최적 동선이라는 이름의 명령이 개별 노동자의 신체를 분 단위로 규율한다. 소명의 기회도 없이 계정은 정지되며, 알고리즘의 설계 원리는 끝내 그것에 종속된 자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누군가는 근로자성을 법적으로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묻는다. 유연성을 중시하는 이들은 이 신체들을 하나하나 계약으로 묶는 순간 혁신이 억제되고 플랫폼의 경쟁력이 약화된다 말하고, 그 반대편에서는 혁신의 이면에 위험이 외주화되고 있으니 보편적 안전망으로 노동의 빈곤화를 막아야 한다 말한다. 국민의 72%가 이들을 노동자로 인정해야 한다 답했다지만, 나는 이 찬반의 구도 자체를 잠시 미뤄두고 싶다. 이 물음이 딛고 선 땅, 그 기원을 먼저 파고들지 않는다면 모든 제도적 논의란 결국 껍데기에 그치기 때문이다.



2. 미셸 푸코와의 만남: 나의 해석–기업의 통치성


그래서 나는 미셸 푸코라는 한 철학자의 눈을 빌리기로 한다. 우리는 흔히 권력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배운다. 마르크스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했고, 슬롯계약론은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여 권력을 위임한다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의 합을 넘어선 슬롯라는 실재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푸코는 다르게 보았다. 권력은 어느 한 곳에서 발원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 안에 이미 스며 있는 비가시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한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의무교육과 군대와 작업장과 온라인 게임을 통과하며 스스로 순종하는 신체가 되어 간다. 자유롭게 선택한다 믿는 그 선택마저, 실은 관계의 외력이 빚어낸 부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푸코가 단지 그런 미시적인 규율만을 말했다면 나는 그를 굳이 이 자리에 불러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비범한 이유는 인구 전체를 관리하는 거시적 권력의 문법까지 규명했다는 데 있다. 안전이라는 명목과 통계라는 도구로 인구 전체의 행위를 인도하고 관리하는 고도의 기술, 그가 통치성이라 부른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를 채택한 통치성은 모든 인간을 비용과 수익의 계산 위에서 경쟁하고 스스로 모든 위험을 바카라임지는 존재, 곧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변형시킨다. 여기서 무서운 것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성이다. 플랫폼은 노동자를 자유로운 사업자로 주체화하고, 그렇게 주체화된 인간은 외부의 지시 없이도 배달 하나를 더 받기 위해 스스로를 태운다. 아무도 그를 채찍질하지 않는데, 그는 스스로 소진된다. 자기가 자기를 경영한다는 착각, 그 착각이야말로 가장 정교한 통치의 기술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떠받치는 하나의 믿음이 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은 공정하다는 믿음. 이 믿음은 하나의 진실의 레짐을 이루어, 노동자의 인권이라는 반대 담론을 소리 없이 억누른다. 푸코에게 지식은 언제나 권력에 봉사한다. 그렇다면 알고리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시대의 지식이며, 주체를 빚어내는 망이다. 배차의 논리와 수수료의 셈법을 소유한 자는 곧 인간을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주조할 권한을 쥔 자이다. 노동자들끼리의 소통을 끊어 파편화하고 서로를 경쟁자로 배치하는 순간, 권력은 더없이 매끄럽게 작동한다. 그들이 이 권한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가? 법률의 빈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근로자 추정제가 부재한 그 공백 속에서, 본래 국가에 속했어야 할 통치성의 일부가 사적 기업의 것이 되었다. 90만 인구를 다스릴 통치의 권력이, 근로계약이라는 형식 없이 실질 이전된다.



3. 근로자 추정제와 통치성 회수


그렇다면 이 벌어진 틈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첫 번째 길은 근로자 추정제이다. 이제껏 자신이 노동자임을 스스로 입증해야 했던 사람에게서 그 입증의 짐을 덜어, 아니라는 증명을 사업주에게 되돌리는 것. 사소해 보이는 이 전환은 실은 주권의 변형이다. 기업 통치성에 복속되었던 인구를 법률을 통해 국가의 통치성으로 회수하는 일이며, 개인사업자라는 진실의 레짐에 맞서 국가가 보호할 노동자라는 반대 담론을 세우는 힘의 재배치이다. 물론 권력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푸코의 말대로 권력은 어디에나 있으므로, 다만 그 성격이 바뀔 뿐이다.


두 번째 길은 지식을 여는 것이다. 모든 지식은 어떤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에, 시대의 담론에 편입되지 못한 진실은 진실임에도 말되어지지 못한 채 묻히곤 했다. 멘델의 유전학이 오래 침묵당했듯, 지동설이 사목의 권력 앞에 입을 닫아야 했듯. 반대로 지식이 권력에 봉사할 때 그것은 스탈린과 히틀러에 의해 인간을 심판하는 처벌 매커니즘으로 작동하여 연명했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이라는 지식 체계를 투명하게 여는 일은 곧 권력과 지식의 결합을 해체하는 일이다. 배차의 원리와 수익의 배분과 평가의 기준을 공시하게 하고, 중요한 결정에는 인간 관리자의 최종 심사를 보장하는 것. 나아가 파편화된 개인들을 다시 결합시켜 알고리즘의 설계에 노동자의 목소리가 스미게 하는 것.


사실 지식이 민주화될 때 비로소 개별 주체인 행위자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끝으로, 고용의 형태와 무관하게 소득을 기준으로 슬롯보험의 그물을 다시 드리워, 위험이 개인에게로만 굴러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4. 근로자 추정제의 국가 통치성 과잉: 우려와 조언


여기까지라면 이 글은 하나의 온건한 개혁안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걸음 더 물러서서 묻고 싶다. 기업의 통치성이 국가의 통치성으로 대체되는 것은, 과연 본질에 있어 우월한 일인가? 국가의 권력에 대한 또 다른 감시와 견제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불투명한 사적 통치를 또 다른 불투명한 관료의 통치로 갈아 끼우는 데 그칠지도 모른다. 결국 슬롯의 모든 제도는 끝없는 가치 판단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어떤 해방도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으며, 끊임없는 토론과 비판을 요구한다.


나는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싶다. 첫째,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플랫폼의 손에서 국가의 손으로 인구가 회수될 때, 그 인간이 통계적 객체로만 관리되는 수단적 존재로 전락하지 않도록, 우리는 개별자 하나하나의 존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쉼 없이 물어야 한다. 둘째, 개혁이 낳은 새로운 권력에도 엄정한 저울이 놓여야 한다. 거대한 담론에 삼켜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익히는 것, 푸코가 만년에 자기 배려라 불렀던 그 자유의 실천이 필요하다. 해방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새로운 질서 또한 언제든 해체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근대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경고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숱한 독재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그것이 슬롯의 정답은 오직 하나라 믿은 자들에게서 왔다고 생각한다. 비판이 허락되지 않는 거대 담론은 스스로를 정의라 부르고 종합이라 부르며, 자신만이 정답이라는 이유로 모든 폭력을 정당화했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의 명제 앞에 선다. 전체는 거짓이다. 전체주의에 가장 매섭게 맞섰던 아도르노는,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는 획일성이 어떻게 독재로 이어지는지를 보았다. 테제와 안티테제가 결합해 마침내 하나의 최종적 종합에 이른다는 역사관, 세계가 언젠가 하나의 고정된 정답으로 완결되리라는 그 믿음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세계에는 정답이 없다. 통치성이 종합이라는 이름의 정답이 되어 그 정답에 담기지 못한 개별자를 짓밟는 순간, 그것이 국가의 것이든 기업의 것이든 모든 통치성은 폭력이 된다. 하나의 정답만이 있다고 믿는 그 태도가, 바로 슬롯를 그렇게 만든다.


그러므로 끝없는 의심과 비판과 견제, 그 행위 자체가 곧 자유의 실천이다. 우리는 국가가 만든 법조차 완벽한 정답이라 믿지 말고 당당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 무비판적인 수용을 언제나 거부하는 그 무한한 반정립이 곧 자유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모든 이야기가 한낱 유리알 유희에 불과하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상만을 좇아 실무와 제도의 언저리에 머무는 것은, 눈먼 자가 코끼리의 코만을 만지고 그것을 전부라 우기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이론이란 현실을 뒤늦게 받아 적거나 실천에 복종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론을 세우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그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실천이다.


언제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어떤 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신성시하지 말라.

그것을 기꺼이 의심하고 해체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

그 끝없는 반정립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기에.






이 글은 필자의 논문

Lee, Sunwoo, Governing the Algorithm: Platform Labour and the State's Recapture of Governmentality under Korea's Proposed Basic Act on the Rights of Working Persons (May 15, 2026). Available at SSRN: https://ssrn.com/abstract=6773379
or http://dx.doi.org/10.2139/ssrn.6773379

를 바탕으로 한 사유의 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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