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숙이는 게 늘 겸손은 아니니까
차를 타고 개발되지 않은 외곽 지역을 지나가다 보면 가끔 황금빛으로 물든 논밭이 눈에 들어온다. 그럴 때면 오래전 추석날, 할머니 댁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길은 택시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다. 길 양옆으로 누렇게 익은 벼가 가득했고, 바람이 불면 벼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모습이 파도처럼 보였다. 특히 누렇게 익은 벼의 색이 신사임당이 그려진 오만 원권과 비슷해 보여 어린 내 눈에는 그곳이 커다란 ‘돈밭’처럼 보였다.
추석날이면 집에는 어른들만 있었다. 내 또래의 조카들은 오지 않았고, 나는 혼자 심심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엄마 옆에 붙어 있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전을 부칠 때면 나도 그 옆에 따라가 전 부치는 모습을 구경했다. 엄마가 자리를 옮기면 나도 따라갔고, 엄마가 앉으면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특별히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엄마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고, 그렇게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엄마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갈 때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게 말을 걸어주었고, 내가 하는 이야기도 들어주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엄마와 단둘이 시골길을 걷는 시간이 좋았다. 답답했던 집을 잠시 벗어나 엄마의 손을 잡고 걷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시절 나는 누렇게 익은 벼를 보며 그저 돈밭이라고 생각했다. 벼가 왜 그렇게 노랗게 변하는지도, 어떻게 익어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황금빛이 오만 원권과 닮아 보여 온통 돈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들을 때면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걸렸다.
흔히 이 말은 많이 배우고 많이 이룰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가진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도 그 뜻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한 가지 의문은 있었다.
왜 벼는 익을수록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할까.
잘 익었다는 것은 속이 꽉 찼다는 뜻인데, 왜 그 모습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표현될까. 사람도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자기 안에 많은 것을 채울수록 꼭 자신을 낮춰야 하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오래 지나서야 조금씩 알게 됐다.
나도 한때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싫다는 말을 잘하지 못했고, 내 생각을 접으면서까지 상대에게 맞추려고 했다. 참는 것이 배려라고 생각했고, 양보하는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내가 조금 손해 보면 관계가 편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양보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상대에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내가 참는 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는 동안, 누군가는 그것을 내가 참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때 알았다.
나를 낮추는 것과 겸손한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빠가 떠오른다.
어릴 때 아빠는 일하기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묵묵히 해냈다. 그렇다고 부당한 일을 그냥 참고 넘어가는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자신이 받아야 할 권리는 당당하게 찾았다.
어릴 때 나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넘어가면 될 일을 왜 굳이 자신의 권리를 따지고, 할 말을 다 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나도 세상을 살아보니 조금씩 알게 됐다. 자신의 권리를 찾지 않으면 세상은 그것을 배려로 봐주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오히려 아무 말하지 않는 사람을 만만하게 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아빠가 참 멋있다.
아빠는 자신의 몫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해야 할 일은 묵묵히 해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남을 누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은 당당하게 받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해냈다.
그게 내가 이제야 알게 된 아빠의 멋이었다.
세상에 맞춰 살아가는 것과 세상에 굴복하는 것은 다르다.
어쩌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신이 작아져서가 아니라 속이 충분히 여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충분히 알고, 충분히 경험하고, 충분히 자신의 안을 채운 사람은 무조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언제 숙여야 하고 언제 고개를 들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닐까.
겸손은 내가 틀렸을 때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것이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것 역시 필요하다.
차창 밖으로 황금빛 논밭이 천천히 멀어진다.
어린 시절에는 그곳이 돈밭으로 보였다. 이제는 그 황금빛을 보면 오래전 할머니 댁에서 엄마 손을 잡고 걸었던 길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아빠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잘 익는다는 것은 정말 고개를 숙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걸까.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잘 익는다는 것은 자신을 무조건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숙여야 할 때는 숙이고, 지켜야 할 때는 고개를 들 수 있는 것. 남을 누르지 않으면서도 나 자신을 함부로 내어주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성숙에 더 가까운 모습인지도 모른다.
나도 언젠가 충분히 여문 사람이 된다면, 누군가에게 눌려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충분히 채워진 것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정말 고개를 들어야 하는 순간에는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어쩌면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 이유도, 자신의 가치를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여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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