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가 나를 위로한다

도시 집으로 왔다.

by산너머 작은집

내가 살고 있는 산골마을 '산너머 작은 집'을 잠시 떠났다. 그리곤 도시 집으로 왔다.


유독 나 홀로 시간을 즐기는 내게, 텅 빈 도시 집은 완벽한 힐링 공간이다.


친구와 약속이 있거나 병원 예약이 있을 때 주로 혼자 온다. 아니, 가끔 산골을 벗어나고 싶을 때 도시 친구들과 약속을 하거나 도시 병원에 예약을 잡아 둔다.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KTX 기차역으로 향했다. 나를 기차역에 내려주고 떠나는 남편 뒷모습이 아쉬워 보이지만 애써 모른 척한다. 마치 여행 떠나는 느낌으로 기차에 올라 이어폰 속 감미로운 음악에 나를 맡긴다. 창밖 들판 위로 몇 마리 새들이 줄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평화롭다. 도시에 가면 따뜻하게 맞아줄 누군가가 있을 듯한 안온함에 벌써 마음이 포근하다.


어느새 산골 생활 5년 차가 되었지만 아직도 시골은 평생 살아온 도시만큼 익숙하지 못하다. 워낙 자연을 좋아해 시골 생활에 쉽게 적응은 하였지만 뼛속까지 나를 바꾸지는 못했나 보다.


5년 전 시골에 농막처럼 작은 주말 주택을 마련할 때는 상주하려는 마음으로 터를 잡은 것이 아니다. 온 가족이 주말에 텃밭도 가꾸고 오붓하게 모여 쉬다 오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퇴직한 남편은 시골이 좋다며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처음에는 남편 혼자 시골에 머물고 나는 황혼 육아를 위해 주말에만 다녀갔다. 의도치 않게 많은(?) 아내들의 로망인 주말부부의 삶을 살게 되었다. 우스개 소리로 3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한다는 속설이 정말 맞는지, 나는 그 로망을 얼마 누리지 못하고 남편과 다시 합치고 말았다.


돌보던 어린 손자를 두고, 환자가 된 남편 곁으로 돌아갔다. 간간히 페이스톡으로 손자를 돌보며 남편을 위한 병원 순례를 했다. 2년이 지난 시점부터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지만, 환자가 된 이후 자주 예민해지는 감정 변화에 피로도가 쌓인다. 마음이 버거울 때면 불현듯 도시집이 그립다.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아파트 앞에서 내렸다.

산을 깎아 지은 작은 초등학교와 도서관 건물이 고향에 돌아온 듯 나를 반긴다. 능숙하게 아파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자마자 정돈된 거실을 지나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나무들로 빼곡한 산허리 바람이 살랑거리며 위로하듯 부드럽게 내 얼굴을 어루만진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웃는 아이들의 소리가 정겹다.


영화표를 예매했다.


내가 혼자 누리는 호사다. 경로우대를 받아 리클라이너 좌석을 9천 원에 예약했다. 9천 원의 행복을 오롯이 즐길 참이다.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한다는 뉴스를 접하면서부터 꼭 보고 싶었던 영화를 드디어 보러 가게 되었다. 매스컴에서는 벌써 1,000만 명(글을 쓰는 시점)이 보았다고 한다. 그 사이 영화가 종영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직도 상영관이 여러 개다.


물론 내가 사는 시골 읍내에 작은 영화관이 있다. 상영관도 두 개뿐이고 좌석 수도 많지 않아 오붓하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다. 게다가 운만 좋으면 나 혼자 영화관을 독차지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사실 에너지 낭비로 원치는 않지만.)


하지만 시골에서는 영화관을 자주 가지 못한다. 성향이 완전히 다른 우리 부부는 영화관파와 넷플릭스파로 나뉜다. 나 혼자 영화를 보면 되지만 운전을 못하는 나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읍내에 나갈 수 있다. 하루에 두어 번 상영하는 영화는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뿐더러 영화관을 불편해하는 남편 옆에서,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기 쉽지 않아 남편과는 영화관을 거의 가지 않는다.


영화를 보기 위해 일부러 도시 집에 온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나 홀로 영화를 즐긴다. 영화 오디세이 내용이 복잡하다는 얘기를 듣고 몇몇 전문가의 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미리 보아두었다.


예매한 시간에 맞춰 집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가을 햇살이 길가에 길게 누워있다. 햇살을 밟고 지나가는 내 발걸음이 통통거렸다. 막 떠나려는 버스를 잡아 타고 롯데 백화점 앞에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영화관으로 올라가니 방금 영화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저마다 만족한 표정으로 영화 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유 있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손에 쥐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연인끼리 친구끼리 그리고 부부가 함께 즐거운 얼굴로 팝콘과 커피를 나누며 소곤거린다. 군데군데 나홀로족도 제법 많이 눈에 뜨인다.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닮은 크고 널찍한 리클라이너 좌석에 몸을 반쯤 눕혔다. 실내 차가운 공기가 싫어 가방에서 커다란 스카프를 꺼내 온몸을 감쌌다. 동석이 없으니 신경 쓸 일도 배려할 일도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미리 예습한 덕에 세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 푹 빠져서 즐겼다. 과연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다.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력은 물론, 화면을 가득 채우는 놀란 특유의 거대한 스케일은 매번 내게 깊은 감동과 행복을 준다.


영화의 여운이 다 가시기 전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 놓인 커다란 TV 화면 가득 갈색 풍경에 리모컨을 멈췄다. 추억의 팝송이 집 안에 나지막이 울려 퍼지고, 창 밖 숲에서 새들이 지저귄다.


따끈한 보이차를 홀짝거리며, 거실 한편에 놓인 바카라상에 앉아 노트북을 천천히 펼쳤다.


자판 소리가 유난히 경쾌하다.

수요일 연재